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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부터 사상교육을 많이 받나요?

    북한에서는 대개 어릴때부터 사상교육을 철저히 하거든요.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면, 전시관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우리 학교에서도 있었고, 전시관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미제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사진으로 보여줘요. 만화처럼 되어있는 것도 있고, 실제 사진도 있는데, 거기 보면, 미국놈이 북한사람들을 거꾸로 매달아서 때리고 어디에다 단체도 묻어가지고 불사르고,이런 사진들이 많이 붙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많이 받구요. 그걸 보면서 우린 “미제 승냥이들하고는 이 땅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존재다” 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교과서 보면 교과서에서도 애들이 놀 때 탱크놀이라고, 우리가 탱크 만들어서 “미제 침략자들을 몰아낸다” 이런 걸로 공부를 많이 시키죠. 그리고 셈 세기 같은 거나 산수 계산할 때도, “미제 침략자들 탱크가 열 대 있었는데, 우리 탱크가 세 대 까부셨다 그러면 나머지는 몇 대냐” 해서 숫자 맞춰야되고 이런 식의 수학문제도 많이 풀고요, 그래서 교육 자체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나 사상교육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남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소학교에서도 그런 사상교육이 되어 있고 노래가 있는데, 노래에서도 보면 “띠띠빵빵 내 동생, 자동차타고 어디로 가느냐 물어봤더니 헐벗고 굶주린 남한의 아이들, 그들을 도와주러 간대요” 하는 시가 있어요. 그러니까 남한의 아이들이 헐벗고 굶주려 있는데, 우리가 걔들을 먹여살린다. 먹여주기 위해서 기차타고 간다. 자동차타고 남한으로 간다고 하는 노래나 시 같은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남한에 대해서 못살고 가난하다는 인식을 교육을 많이 교육시키고요, 실제로 북한에 있을 때 남한 땅 지도 보면서, ‘여기가 정말 못 살고 가난한 곳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구요, 남한에 대해서 돈 없으면 병걸려도 고칠 수 있는 병도 죽어야 되고 이런 교육들을 많이 해가지고. 자본주의라고 생각을 하면 되게 어둡고 침침하고 돈 밖에 모르고, 자기의 가족을 살리려고 눈을 팔고, 장기를 내다팔아야 되고 그런 식의 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내 눈을 100원에 팝니다” 이런 것도 있는데.

    농촌동원은 어땠나요?

    가을이나 봄철에는 농촌동원에 많이 가는데, 학교가 여섯 시간 정도 되거든요. 45분씩해서 8시 30분에 아침에 가서 끝나면 1시 20분에 끝나요. 1시 20분에 퇴근해서, 집에 와서 밥 먹고 다시 학교가서 낮에는 농촌에 나가서 농사일을 해요. 볏단 나르기나, 옥수수 밭에 가서 김매기, 이런 것들 것 하죠.

    몸이 안 좋을 땐 빠질 수 있나요?

    아프다고 하면, 한 두 번은 봐주는데 계속해서 아프다고 하면, 애들이 데리러 온다던가 빠지는 대신에 뭔가 선생님한테 바쳐야 되고 그런 것들이 있어요. 뇌물이죠. 뇌물을 고여가지고 빠진다던가. 이런 게 있어요. 그리고 중학교 3학년 이상부터는 농촌 지원이라고 아예 한 달 동안 나가거든요. 모내기철에. 그래서 거기에 나가는 거는, 모든 학교가 다 나가요. 그래서 4월달만 되면 한 달 동안 학교 쉬고 애들이 다 농촌지원을 나가요. 만일 빠져서 안 나가겠다고 하면 선생님한테 돈을 고이거나 이유가 있어야죠.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어땠어요?

    집이 그렇게 못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이제 부모님이 열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잘 대해주고 잘 못 대해주고 그게 큰 것 같아요. 열성이 있다는 거는, 학교에 자주 찾아가서 선생님들한테 돈 같은거 많이 주고요, 담임선생님한테. 그리고 생일이나 명절 같은 때에 선생님 찾아가서 애들한테 손에다 술이나 밥같은거 도시락 같은 거 싸가지고 선생님 생일축하 한다고 간식 같은 것도 주고. 그리고 학교에서 내라는 거 잘 챙겨다 내주고 그런게, 선생님들한테 바치는 게 많으면, 되게 열심히 하는 학부형이죠. 아무래도 선생님은 평가하고 학교에 기회가 왔을 때 그 애들을 위주로 그 애들 먼저 챙겨주고 그렇죠. 중학교 때 선생님한테 맞은 적이 있는데요, 학교에서 폭행당한 적이 있는데, 그 때가 학교에서 뭘 내라고 했는데 제가 바치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일어서서 수업을 들으라고 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그래서 너무 쪽팔려서 있다가 선생님한테 반항을 했거든요. 반항을 하니까 선생님이 폭행을 하더라구요. 그 때 많이 맞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 맞고 되게 내지 못했다고 맞는 것 같아서 조금 더 서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열 세 살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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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 음주에 대한 규정이 있나요?

    보통 술을 접하는 시기는 11세 내지 12세, 중학교 바로 올라가면서부터 술을 접하고 그때부터는 술을 전성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술 같은 경우엔, 개인집에서 맥주를 파는 게 있어요. 페트병, 2리터 페트병에 파는 게 있는데 거기 가서 살 수가 있어요. 여기처럼 신분증 이런 게 없고, 구매를 할 수 있는데, 술 단속 그리고 법이 없어요. 학생들이 술 마셨다고 해서 보면 욕은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법적처벌이나 이런 건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구매 할 수 있고..

    연애는 가능한가요?

    북한 같은 경우엔 연애를 자유롭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대동강바위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손을 잡거나 스킨십 같은 것을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있는 공공장소나 지하철, 버스, 이런데선 손도 마음대로 못 잡고, 연인 사이인데도 3m 떨어져서 그렇게 가야해요. 그렇게 안 갈 시에 손을 잡고 가거나 그러면 어른들이 욕을 해요. 뭐라고 욕을 하냐. “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연애질이냐고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고” 하면서. 그리고 ‘규찰대’ 라는 게 있어 갖고, 규찰대가 단속을 해서 걸리면 ‘생활총화’ 라고 사상비판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연애는 몰래 숨어서 했던 것 같습니다.

    생활총화는 어떤 곳인가요?

    북한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모든 사람이 북한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그런 활동인데 한 주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그 주를 김일성, 김정일 얘기에 대해서, 얘기한 것과 유사하게 살았는지에 비교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못살았던 부분에 대해선 자기의 반성시간 이라고 보면 될 것 같고, 옆에 있는 동료들이 그렇게 못 살았던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해주면서 서로 잘못을 지적해주는 시간이라고 보면 될 것 같고, 그것도 분위기를 안 잡고 웃으면서 하거나 가볍게 하려고 하면 분위기 자체를 문제시하고 또 처벌을 줘요. 그 생활총화 만큼은 진지하게 좀 분위기 있게 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되게 많아요. 상처받고, 무조건 한 사람을 비판하라고 해요. 자기반성을 한 다음에 다른 한 사람, 아무 사람이나 찍어서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라고 해요. 그거 안하면 끝나지가 않아요. 친구들 사이에 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주시하고 그런 게 어릴 때부터 거의 커서 죽을 때까지 진행되는 반성시간이라고 보면 돼요. 북한에만 있겠지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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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나요?

    북한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한국처럼 직업을 내가 선택한다는게 없습니다. 무조건 국가가 정해줘요. 그래서 북한에는 모든 도시 군에 노동부라는 부서가 있어요. 우리로 말하면 시, 군, 청에 노동부라는데서 직업 배치를 해주는 겁니다. 노동배치를 해주는데 결국 나는 A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은데 전혀 그와는 다른 D나 F같은 직업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직업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단 말입니다. 무조건 국가가 정해주는 대로 가야됩니다.

    평균적으로 월급은 얼마나 받나요?

    내가 2014년에 왔는데 가장 보편적인 근로자의 한 달 평균 월급이 1500원 내지 4천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1500원 내지 천원가지고 뭘 살 수 있는지를 본다면, 북한 시장에서 쌀 1키로가 오천원 정도하거든요. 그럼 어떤 근로자는 쌀 한 0.8키로를 살 수 있지만, 1500원 받는 근로자는 쌀 한 300~400그램밖에 못 사는 월급이에요. 또 술 한 병이 한 2천원 정도 합니다. 소주 같은 거 그러면 술 한 병 내지 두 병정도 살 수 있는 이렇게 작은 월급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북에 있을 때 결혼 하셨나요?

    결혼했죠. 권장하는 나이가 있는데 남성은 대체로 27내지 30세, 여성은 23내지 한 25~26세. 북한에서는 결혼을 못했다면 조금 이상한 눈총을 받아야 돼요. 다시 말하자면 ‘뭔가 좀 모자르지 않나?’, ‘뭔가 부족하지 않나?’ 뭔가 부족했기 때문에 결혼 못했다는 그런 시각이죠. 그래서 북한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남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결혼하면 자식은 무조건 하나 내지 둘 셋을 낳습니다. 결혼했는데, 자녀 없이 일생을 보내자고 하는 가정이 없어요. 결혼하면 그 가정에는 무조건 자녀가 하나는 있는 거죠. 그러나 건강상이나 의학상 자녀를 낳을 수 없는 가정들도 있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대부분은 자녀가 없는 가정은 북한엔 없다고 보면 돼요.

    배우자를 고려할 때 어떤 점을 기준으로 삼나요?

    가장 중요하기는 상대방의 가정내력이에요. 북한말로 말하면, 계급적 토대와 출신성분. 한 마디로 말하면 부모, 친척 중에 북한 체제를 반대해서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는지, 반혁명, 반당과 같은 행위를 한 사람이 없는지 이런 것들이에요. 또 그 어떤 법을 어겨서 이제 법적 처벌을 받은 이런 게 없는지 봅니다. 북한도 이제 정치적 범죄 말고 일반 범죄도 저질러서 이제 교도소 같은 북한에선 ‘교화소’라고 하는데, 그런 곳을 갔다 왔다면 굉장히 치명적이에요. 직업도 얻기 힘들고 결혼하기도 힘들 정도에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많이 따지죠. 그런데 지금은 많이 좀 달라진 게 인물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봐요.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북한도 최근엔 평양과 큰 대도시를 비롯해서 결혼전문 식당들이 생겼어요. 여기선 웨딩홀이라고 하지만, 북한은 결혼 전문 식당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집에서 해요. 보통 남자 측에서 여성의 집으로 갑니다. 여자 쪽에선 손님들을 전날 집으로 오늘이 결혼식 날이라면, 어제 저녁에 다 치워요. 그렇게 이제 가면 여자 쪽에서 남자가 상을 받아요. 다시 말해, 여자 쪽에서 남자한테 상을 차려주는 겁니다. 여자 부모들한테 인사도 하고, 그 다음엔 또 여성을 데리고 남자 쪽에 가는 거예요. 그리고 결혼식을 할 때 꼭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 해당지역에 있는 김씨 동상 모자이크 벽화 혹은 김씨를 찬양하는 무슨 탑 이런 곳을 꼭 찾아가서 꽃다발을 증정해야 돼요. 그리고 사진 찍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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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군종(해군,육군,공군)선택이 가능하나요?

    북한은 군대를 자기가 원하는 장소 병종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곳으로 가야되고 거기서도 부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병이나 공군 이런 데는 좀 비쌉니다. 국경경비대 같은 경우에는 위쪽으로 많이 올라가는데, 양강도 혜산 쪽에 중국 쪽 국경을 지키는 곳이 있습니다. 그쪽이 제일 비쌌던 것 같습니다. 2천달란가 천달란가 주면 국경경비대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공군 같은 경우에는 800달라 정도면 나갈 수가 있고 가격이 다 달랐단 말입니다. 병종별로 가격이 있었어요. 제일 비싼 데는 국경경비대였고 그 아래는 공군 해군 이런 식으로 가격표가 있고, 그리고 그런 걸 안 썼을 경우에는 무작위로 국가에서 배정해주는데 군사동원부라는 곳에서 배정 보직배정을 해준단 말입니다. 거기가면 뭐 거기서만 쭉 해야 하고 진짜 운이 좋아서 병종이동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진짜 어려운 경우입니다.

    북한의 휴가와 외출은 어떤가요?

    북한군에서는 휴가가 없습니다. 휴가가 없어서 보통군인들이 휴가를 못 가고 10년 동안 근무를 합니다. 그래도 집에서 잘 살면 좋은 점이 또 있습니다. 북한은 부조리로 안 되는 게 없으니까 집에 가서 부대에 필요한 물자 즉, 우리 돈 자금을 갖다 주면 부대에서 능력만큼 쉬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평양 애들은 거의 1년 동안 집에 와서 쉬다가는 군인들도 있단 말입니다. 외출은 북한군엔 없습니다. 외출을 하면 자유주의 행동이라고 해서 처벌을 받습니다. 혼자이동이 안 되고 북한군은 무조건 2인1조 아니면 다수가 같이 이동을 합니다.

    군입대 후 연애는 못하는 건가요?

    개별 임무수행 하는 군인들은 연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에서 통제하는 것 외에도 대부분 연애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연애하자고 하면 돈이 있어야하고 시간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북한군은 화장실 갔다가 오려고 해도 보고를 해야 합니다. “중사동지 지금 화장실 갔다 올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입니다. 근데 화장실 갔다 오라고 해야만 갔다 올 수 있습니다. 당장 마렵다고 해서 갔다 올 수 없습니다. 시간이 아예 없다고 보시면 될 것 같고, 사탕 한 알도 못 사먹으니까 연애를 할 수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대면회는 어때요?

    면회는 할 수 있습니다. 근데 면회를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 교통이 좋지 않다보니, 저도 군대나갈 때 평양에서 강원도까지 갔었는데 일주일 갔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오려고 하면 써비스차라고 보리차라고 있는데, 그걸 타고 한 이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이 엄청나게 깨지 잖아요. 그래서 면회를 보통 안 오고, 저희 때는 전화 돈을 싸줬습니다. 한국이 80~90년대 전화카드를 이용해서 전화를 했던 것처럼, 북한은 지금 되게 인기가 많은데 전화 돈을 쏴주면 해당 지역에서 바로 현금으로 교환해서 준답니다. 그게 인기가 많고 상납용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나오잖습니까. 전화카드 만원 이만원. 아무튼 그래서 인기가 되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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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나 공장에서 인사제도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원칙적으로 북한에서는 어떤 회사든지 사장이나 북한에서 대부분 그 회사로 되어 있으면 사장이고 기업소로 되어 있으면 소장이고 그 어떤 공장으로 되어 있으면 지배인이라고 해요. 공장 책임자가 사무직이나 관리직을 임명할 권한이 없어요. 그럼 이 사람들에 대한 인사는 어디서 하냐면 노동당에서해요. 그래서 북한에는 자그마한 기관, 공장, 기업소, 회사에도 노동당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 초급당 혹은 당 간부가 있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초급당 면장이라고 하죠. 그래서 여기선 일반 근로자의 인사배치, 즉 직종배치는 노동 부원이 하지만, 관리직이나 사무직은 회사나 공장이 속해 있는 당 위원회에서 한다는 거예요. 핵심 지배인이나 주요 사람이 관리직에 사무직에 누구를 임명할 권한이 없다는 거죠. 결국 승진은 노동당이 다 컨트롤 한다고 봐야 해요.

    자녀 양육이나 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북한에서는 저녁 어두워 질 때까지 아이들이 밖에서 놀아요. 그렇게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부모들이 아이들을 찾아요. 그래서 농촌이나 지방에 가면 저녁에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부모들이 저마다 아이들을 찾는 모습을 쉽게 보죠. 교육은 어렸을 때 일단 학교에 가서 학교를 무조건 보내야 되죠. 북한도 교육시스템은 말로는 무료 교육인데, 실제론 부모들의 부담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실 꾸리기라고 해가지고 페인트칠을 합니다. 유리가 깨져서 유리를 교체한다거나 최근에는 모든 교실에 티비를 놓거나 비디오를 놓거나 하는데, 이러한 부담들을 모두 학부형들이 부담을 하는 거예요. 국가가 이익을 보장해줄 여력이 없어요. 그래서 학급 학생학부형들이 얼마만한 필요한 돈을 모아서, N분의 1로 나누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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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소에 아침에 눈뜨면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북한의 일과를 보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메인 조직에서 하루 전에 ‘동원에 가거나 멀리 힘든 데를 가거나’ 이렇게 걱정이 되면 긴장해서, ‘오늘 저녁에 일찍이 자야지’, ‘빨리 일어나서 남보다 먼저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보다 밀리면 자기 승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조직에 매어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잘나가야 하는 거예요. 사람들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 나이에 다른 사람들 과장, 부장해서 올라가는데 나도 내 몫을 하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모퉁이가 어느 것이기 때문에 거기부터 올라가야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가는 거예요.

    정년 퇴직이 있나요?

    북한은 여기처럼 연금이 없어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 체제하에선 특히 평양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퇴직해도 죽을 때까지 먹고 살겠지만, 우리처럼 지방 같은 데에 있는 분들은 퇴직되면 갈 때가 없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제일 선호도가 높은 직업이 시장관리원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도 일자리에서 그만두면 시장관리원하거든. 거기선 장마당 관리원이라 부르지. 세금 징수하는 사람들이거든. 이 분들은 ‘공간’이 많아요. 자기 장자리라도 장 보러 나와야 세금을 걷는데, 장마당 관리원이 “이 날 안 나왔더라” 이러면 다한 거예요. 안 나온 걸로 해서 안 내도 된 거죠. 그래가지고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장마당 관리원 하겠다고 한 거고, 군사동원부 부장, 부부장 이놈들이 여기로 말하면 중령, 대령 달았던 영관급 장교들인데 그만두고, 시장관리원 완장을 끼고 다녔건거지. 그런데 북한 실정에서는 자기가 60이 넘어도 나가서 제 돈벌이 한단 말이죠.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가 있을 때만 해도 그 사람들이 ‘내가 일을 그만둔 다음에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겠는가’ 생각했고, 다 개인이 분업화가 된 거예요. 다시 말해, ‘그 다음에 무얼 먹고 살겠는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살겠는가’ 생각했죠.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길이 열리겠지 그랬지만, ‘퇴직 후에 마누라가 장마당에 앉아있는데 내가 뭘 도와주겠는가’ 하는 생각까진 못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목수 공구를 갖춰놓고 나무 깎아서 가구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그 다음에 집에서 음식 가공하는 사람, 두부를 만드는 사람 등 여러 사람도 많았어요.

    노후보장수당과 같은 혜택이 있나요?

    없지. 그것 없어진지 오래예요. 초기에 아버지 있을 때만 하더라도, 6.25전쟁 때 참가한 노병들, 기사급수 3급 이상들, 연로보장 받은 다음에도 국가가 의무적으로 하루에 식량 600그램에다가 현금 60원을 준다고 할 때였지. 초창기 사회주의 할 때만 해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고난의 행군 들어가면서 임의로 사라졌어요.

    국가에서 보장해주는 급여가 있나요?

    없지. 나라에서 어떻게 줘. 줄 수가 없어. 생산량이 나오는 게 있어야 주지. 양고기 생산해야 하는데 나라에서 시골의 농민들이 농사지은 게 맨 먼저 군량미라고 다 뽑아가고 그 다음에 식량 수매하라고 옆에 뽑아가고, 농민들이 없으니까 심지어 가을걷이 양곡 판정 나오기 전에 빼돌리지. 가을걷이 시작하면 작업반장이 올해 우리 작업반 분주 안에서 제일 식량 때문에 고생하는 집을 생각하곤, 눈감고 밭에서부터 훔쳐가지고 “야 아무개 너 퇴근에 들어갈 때, 너네 달구지에다가 저기 옥수수 몇 마디 쟤네 집 갖다 줘라. 쟤네 집 당장 굶어 죽는다” 이럴 판인데. 심지어 집단 사회주의 농촌체계라서 땅을 가족들마다 나눠주면서, “너네 거기서 생산량 얼마해서 나라에 얼마 받치고 얼마 없는 나머진 너네 먹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땅을 이제처럼 좋은 땅이 100 중에 90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이거는 군당 책임비서 땅, 이거는 누구 땅 해가지고 고건 또 따로 농사져서 간부들 따로 걷어가고. 이런 식으로 아직도 하고 있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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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학교 재학 중 흥미로웠던 과목은 뭐에요?

    산수랑 여러 가지 많은데, 주목적이 우리를 계급적으로 각성시키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수학문제를 푼다는데 “6.25전쟁 때였습니다. 인민군의 아저씨들이 승냥이들의 탱크를 몇 대를 까부시고 몇 대를 살상 포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포를 한 건 몇 대고 까부신 건 몇 대입니까 해서 도합얼마였습니까?”이런 식으로도 문제를 만든단 말입니다.

    소학교 학생들도 농촌동원을 가나요?

    북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강냉이 영양단지는 학생단지다, 학생들이 심었기 때문에 영양단지다.” 영화대사에서 있는 말입니다. 농촌동원 가는데 우리 지역에 약초들이 지네 많단 말입니다. 인삼도 있고 양귀비 꽃도 있는데, 동그란 알 같은 거를 냅다 두드려가지고 씨를 받는단 말입니다. 애들이 간식 구경이라는 것 전혀 못하지 않습니까? 북한은 그게 간식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한줌씩 오래 씹으면 고소한 겁니다. 그걸 먹고 졸려서 “아 졸리다 졸리다” 이렇게 하면서도 맛있으니까 그냥 먹게 되는 거예요.

    보통 뭐하고 놀았어요?

    북한에서 탄피 같은 게 많이 돌아다닙니다. 애들이 그거를 주어가지고 이렇게 막 따먹기 하면서 논단 말입니다. 한국에서 말하면 동전 따먹기랑 비슷합니다. 그리고 딱지치기를 엄청 많이 하는데 북한에 종이가 엄청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학교에서 “폐휴지 내라, 휴지 내라” 이렇게 많이 하고, 집에서 불사를 때 종이가 얼마나 많이 필요합니까. 아궁이 때우려면 종이 진짜 많이 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애들이 밖에 나가서 종이 딱치를 엄청 많이 친단 말입니다. 그렇게 벌어온 종이를 학교에 내거나 집에서 쓰고 이럽니다.

    학교생활은 어땠어요?

    학교생활하면 열 받았던 게 선생님이 수업시간이 아닌데 저희를 따로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중요과목 들고 오라고 했는데, 저는 중요과목이 국어랑 수학인줄알고 국어랑 수학을 챙겨갔는데 제가 지네 맞은거예요. 왜냐하면 위대한 대원수님의 어린 시절을 안 챙겼다는거죠. 그 때 진짜 썩어지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애들을 엄청 많이 때리는데 엄청 두꺼운 나무로 때리고 난로할 때 쓰는 쇠꼬챙이로 때려서 어떤 애는 수술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선생님이 나한테 아침공부 과제시간에 글씨 개판이라고 하면서 3점을 주는 거예요. 근데 옆에 애는 나보다 더 못썼는데도 5점이라 말입니다. 이거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데, 선생님이 저한테 돈을 요구했는데 제가 가정형편이 안 되서 못줬던 것 때문이에요. 그리고 선생님이 돈이 많은 애들은 옷도 입혀주고 “~누구야~누구야” 이렇게 하면서 진짜 예뻐해 주는데, 돈이 없는 애들은 막 엄청 미워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선생님 집에 도둑이 많이 드니까 제가 선생님 집에서 집을 자주 지켰단 말입니다. 그런데 1년 전에 갔을 때는 완전 못살았는데 1년 후에 가니까 완전 결혼 할 거를 다 장만 한 거예요. 세탁기, 냉장고와 같은 물건들이 진짜 많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애들한테 말했는데, 애들한테도 다 돈을 요구했다는 겁니다. 자기 생일이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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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선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가나요?

    우리는 학교를 갈래야 갈 수가 없어요. 신발조차 사자고 해도 돈이 들어가야 하고 책이나 학용품, 하여튼 애를 학교에 보내려고 하면 드는 게 있잖아요. 그걸 보장해주려면 어느 정도 갖춰줘야 하는데 그걸 못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행히도 한 두 달인지 있다가, 석달이네. 4월에 와서 7월까지 다녔으니까. 석 달 동안 학교 안다니고 여기 있고. 친척들이, 큰엄마가 신발 갖다 주고 사촌언니가 책 사줘서 우리를 학교에 보낸 거예요. 그런데 북한당국은 11년제 의무제 교육이라고 해가지고 무조건 애들은 나오게 하라니까 애들이 죽어나는 거예요. 매일 동무들 데리러 집에 데리러 가는 거예요. “야~아무개야 학교 가자 학교 가자” 이렇게 계속. 이렇게 애들한테 끌려오면 또 엄청 미안한 거예요. 선생님들도 돈 안낸다고 욕하지, 일어나서 욕먹어야지, 그리고 또 옆에 애들은 걔가 만약에 우리 조에 포함됐잖아요, 그러면 조별로 돈 내는 거 하거든요. 우리 조는 7명인데 7명에서 얼마 내야 한다 해서 7등분해서 해야 하는데, 걔가 안내면 우리가 걔 몫까지 500원 더 보태서 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 자체가 미워하는거예요 걔를.

    고등학교 입학 준비 어떻게 하나요?

    5학년 때는 우리가 16세. 16세 때부터 청년근위대 가는데 거긴 일주일간 가거든요. 갈 때는 군대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에서 입는 옷이 아니라 거기서 군복을 내주면, 군복을 입고 총을 메는 군사놀인데 진짜 총인 거예요. 엄청 무겁더라고요. 그래가지고 보복전진하고 산등성에 올라가서 뒹구는 것도 하고, 다 어린애들이니까 무릎 베고 팔목이고 피멍이 좀 지죠. 그렇게 해서 밤 10시까지 자는 것 자체가 정리정돈, 옷도 1~2분 안에 벗고 정리하고 이렇게 하니까 엄청 마지막까지. 일주일 견디는 게 막 한 달 같고, 엄청 힘들더라구요. 마지막 날 7일이 되면, 사격하는 날인데 총알 3발 주면, 10개 자리를 정해주면, 거기에 업대가지고 쏘는데, 3등급으로 나눠가지고 ‘량급’, ‘우량급’ 해가지고 ‘우’ 맞으면 제일 높은 사람이고 ‘량’이면 30점이라면 20점 이하, 급이면 맞아요. 엄청 못 맞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총쏘기도 하고, 이제부터 우리가 청년 군에 입대한 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의 우리의 삶은 청년동맹원임과 동시에 붉은 청년 근위대 대원인 거예요. 그래서 언제든지 전쟁되면 우리도 예비군이에요. 전쟁 일어나면 우리는 무조건 군대 나가는 대원들이에요. 안 나가는 게 없고, 백프로 하여튼 고 나이만 16세 지나서는 필수니까. 안 참가하겠다고 해서 안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국민의 의무라고 보면 돼요. 그래가지고 청년근위대 가고 이제부터 군사훈련은 매해 참가하는 거예요. 한 달에 한 번이든 꼭 참가해야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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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사노동은 어떠셨나요?

    혼자 다했습니다. 나무패고 물 깃고 장사하고 1인 10사람의 몫을 다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게 밤에 이대로 그냥 계속 잤으면 좋겠다는 거죠. 맨날 수면부족에 시달렸던 게 지금 생각나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게 당연하다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시부모에게 뇌출혈이 있었습니다. 뇌출혈 와가지고 한 십년 동안을 대소변을 받아내는 그런 상황으로 살았는데, 동네에서 칭찬이라든지 있을 수 없죠. 왜냐하면 북한에는 맏아들한테 시집간 며느리는 당연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선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 대해 어떻게 대우하나요?

    북한에는 병신이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저희 시어머니가 반신 못 쓰는 사람이었는데 대소변 처리를 혼자서 하게 되면 계속 냄새 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가면 애들이 병신집안에 애라고. 그런 반신불수의 시어머니를 10년 동안 부양하면서도 ‘똥오줌 싸는 게 보기 싫어죽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한 번도 안 했던 거 같아요. 나 하나 힘들더라도 가정을 위해서는 이만큼 희생해야 한다는 게 있으니까 견뎌내지 않나 싶었습니다.

    북한에 계셨을 때 결혼을 한 친구들이 있었나요?

    결혼 다합니다. 북한은 25세 전에는 결혼을 해야죠. 그 이후에 하면 “60세까지 처녀로 환갑상 받는다.” 그럽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시집 못 간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런데 제가 29세에 결혼했지 뭐입니까? 내가 선생님하면서 높았지. 애기를 30세에 낳았단 말입니다. 병원에 응급으로 갔습니다. 그만큼 애기 낳는데도 그 나이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그 전에는 다 시집갑니다. 그래서 보통 30세에는 애기가 다 있습니다.

    결혼은 보통 중매로 하나요?

    중매결혼이 70~80퍼센트 됩니다. 그리고 한 10명 중에 2명은 자유 결혼하는데 이를 좋지 않게 봅니다. 왜냐하면 나이 대에 비해서 발그라졌다던지 좀 안 좋은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유 결혼하는 것보다는 부모님이 점지해준 배우자하고 하는 게 더 착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게 하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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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근위대는 어떻게 가시게 되었나요?

    청년근위대 저희 집에서 가지 말라고 했어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가 “가지 말아라” 이렇게 했거든요. 근데 제가 너무 가고 싶었어요. 애들하고 같이 다니는 거 되게 좋아했었죠. 제가 떠나는 날까지 아버지는 “가지 마라. 안가도 되는 건데, 굳이 가지 마라.” 말했죠. 청년근위대 가게 되면, 군사동원부 오르게 되거든요. 내가 청년근위대를 안 갔다 하게 되면 명단에 안 오른대요. 즉 군대를 나가는 문건에 안 오른대요. 이를 알고 저희 아빠 엄마는 어차피 “군대 안 갈꺼잖냐고, 그러니까 괜히 거기 갔다가 명단에 딱 이름이 오르기가 더 시끄러워지니까 가지 말라” 고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래도 제가 너무 가고 싶어서 갔어요. 그런데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부터 가자마자 마당에 빗자루 쓸라고 하는데 차에서 내리면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너무 힘든 거죠. 차타고 내내 거기 도착지까지 갔는데, 그것만으로도 몸이 지친 거죠.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빗자루까지 꺾으라고 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보내고 다음날에는 비가 막 오는 거예요. 그 속에서 훈련하는거죠. 몸이 막 젖는데 조준연습하고 힘들었습니다.

    중간에 그만 둘 수 있었나요?

    안하고 싶어도 무조건 해야 하는 겁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죠.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하는 게 아니거든요. 엄청 욕을 많이 먹어야하죠. 즉 내가 만약 “환자가 돼서 참가하기 어렵다” 라고 말하면 “치료받다가 며칠이라도 마지막 실탄 사격할 때 그 날이라도 참가해라” 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 다닐 때 저희 학급에서는 두 명이나 그렇게 했어요. 몸이 아파 병원에서 입원한 상탠데, 와서 하라고 해서 일주일을 받으면 삼일 전에 와서 이틀을 훈련을 받고 일주일 되는 마지막 날엔 실탄사격을 하는 일도 있었어요.

    직장은 어떠셨나요?

    직장은 너무도 싫었어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생기는 신설이었거든요. 제가 학교 딱 졸업하는 해에 제가 가야할 직장이 생겼어요. 저희 학교 졸업생들이 다 같이 직장에 가면 아무 말도 안 하겠는데 말이죠. 물론 군대를 나간다거나 대학을 가는 애들은 당연히 안 되는 거고, 그곳에 안 가는 애들이 직장에 결국 들어가야 하는거죠. 학교에서 그리 배치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마침 제가 가야할 직장이 저희 마을에 선거예요. 집 앞에 5분 거리에 드는 곳이었어요. 직장이 있는 마을 주변에 있는 애들만 들어가라는 거죠. 저는 거기서 너무 반감이 생겼어요. ‘왜 이렇게 하지’ 나머지 애들은 직장을 안다니고 무직으로 있는 애들도 있거든요. 북한에서는 이제 학교를 졸업하면 한 해 정도는 휴식을 해요. 노동하는 나이가 있대요. 나이를 채울 때까지 일 년을 공짜로 놀게 되는데, 저는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요. 학교 졸업하자마자 3월말에 졸업하잖아요. 그럼 4월부터 취업해야 하는 거예요. 직장자체가 신설이기도 하고 재정적으로 많이 딸리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받는 게 없었죠.

    건설 현장에서 장비는 제공해주나요?

    없는 거예요. 시멘트 하차를 하잖아요. 차를 실어 왔으면, 이제 청년돌격대라고 청년들이거든요. 청년들이 와서 삽을 가지고 시멘트 하차를 하는 거죠. 여름철에 시멘트 엄청 뜨거워요. 근데 아무런 장비가 없는 거죠. 그냥 옷을 입고 하는데, 옷에 시멘트가 묻으면 한 번 딱 그러면 그 옷은 못 입는 거란 말이에요. 시멘트니까. 머리에 대충 시멘스 돌로 가리긴 하는데 그거 가지곤 안 되는 거죠. 장비가 없었어요. 건설을 하는데 건물이 어지간히 높이 올라갔잖아요. 지붕을 이제 하는데 거기서 아무런 장비가 없다보니까 거기서 일하던 분이 땅에 그냥 추락해서 떨어진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척추 뼈가 어떻게 됐다고 실려 갔었죠. 그렇게 현장에서 사고가 나는 일도 있어요. 아무런 장비가 없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거죠.

    사고 나면 어떻게 조치하나요?

    저희는 촌이거든요. 직장이 촌에 있어요. 그래서 큰 병원에 나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죠. 그래도 동네에 개인의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집에 우선 가요. 1차 처치를 받고 그러죠. 그 다음에 우선 구급 응급처치부터 한 다음에, 큰 병원에 나가는 거죠. 보상을 해준다고 말로는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많이 해주는 것 같지 않아요. 일단 병원에 가면 입원하면 치료비가 다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리 무료라고 그래도 다 치료비는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걸 직장에서 해줄 뿐이지. 그리고 그 사람은 이제 다쳤으니까 더는 현장에 있을 수 없잖아요. 집에 보내게 된단 말이에요. 집에 가면 끝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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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원훈련은 어떠셨나요?

    어린이 집 빼고는 동원 다해요. 초등학교 때부터는 죽을 때 까지 다 있다고 보시면 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이제 아침에 제가 살던 지방이 좀 추운 지방이다 보니까 겨울에 눈이 오면 그대로 다 얼어버려 가지고 빙판길이 엄청 많아요. 그걸 까는 거죠. 이런 구호가 있어요. “언제나 장군님을 모실 수 있게 준비하자.” 이런 구호들이 곳곳에 붙여져 있으니까 항상 내가 사는 도시, 내가 사는 마을에는 김정은이 올 수 있게 준비를 하라 이거에요.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 눈이 오고 빙판길이 생기면, 집집마다 온 도시를 불러내는 인민반장이라는게 있거든요. 돌아다니면서 두드려요. 새벽 4~5시 되면 겨울 같을 때는 정말 어두운데, 앞도 잘 안 보이는데 도끼나 망치나 들고 나오라고 합니다.

    그럼 솜으로 된 신발이 있어요. 북한에는 '동화'라고 하는데 그거 신고, 수건 쓰고, 엄청 두꺼운 동복을 입고 나가서 까는거죠. 길을 다까요. 까면서 이런 생각 했었죠. ‘아 우리는 한사람을 위한 노예집단에 불구하구나’. 그걸 까는 동안에 밥을 해서 애들 깨워서 학교 갈 준비하거나 어린이집 가야 할 엄마들이 거기 다 나온거 거든요. 그러니 집안에 다른 식구들이나 남편이 있으면 돌아가면서 할 수 있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직장이 멀어서 며칠에 한 번 오다나니까 제가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애를 학교에 밥 못 먹이고 보내는 게 엄마입장에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어떻게 보면 제가 그리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주 못살진 않아서 사람을 사서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었죠. “좀 도와주세요.” 이러면 그 사람이 “얼마주세요” 하면 그 돈을 지불하고 그분이 대신해서 얼음을 까주는 거죠. 인민반장한테는 “몇 층, 몇 호 우리 집에 이분이 나갑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고, 저는 집에서 밥을 해서 애를 먹여 보내는, 이런 강제노동을 많이 합니다.

    자녀의 진로지도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들이 공부를 잘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잘해서 기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어떡하지? 공부를 저렇게 잘하는데 뭐를 시키지’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잘하는가에 따라 또 다르자나요. 자연계쪽으로 이과쪽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문과 쪽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한데, 북한은 그걸 선택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잘 먹고 잘 살려면 권력을 쥐어야 되기 때문에 그냥 검찰, 보위부와 같은 곳 가자는 게 애들의 목적이거든요. 어린애들이. 난 그렇게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은데, 그러한 사회에서 살면 그렇게밖에 될 수가 없는 조건, 이게 참 힘들더라고요. 애를 키우면서 보니까.

    가사노동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빨래는 꼭 해야 하는데, 물을 안준답니다. 북한에서. 그래서, 손으로 빨래를, 때가 있다는 부분들을 빨래로 다해서 쌓아뒀다가 그거를 소량에다 대하 같은 데에다 받아서 이고 압록강으로 나가는 거죠. 압록강으로 나가서 빨래 망치로 얼음위에서 빨래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땟물을 뽑는데 그 물에다가 빨래를 넣는 순간에 겨울 같은 경우엔 동태처럼 얼어버려요 빨래가. 막 헹구고 두드리고 씻고 해서 들어오면 몇 시간. 그러한 생활을 하다보니까, 그래도 빨래를 하면서 빨래물이 흘러가는 걸 보면서 순간 그 순간에는 마음이 개운하죠. ‘오늘은 그래도 내가 가정주부로써 뭔가 했구나’ 그렇게 소박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가택수색 경험이 있으신가요?

    가택수색이라기 보다는, 숙박검열이라는 게 있어요. 특히 국경이나 평양시 같은 경우는 ‘이집에 등록된 식구 외에 누가 오늘 밤에 자는가’ 를 감시를 하는 거죠. 그러니 매집마다 아파트라면 아파트에, 여기는 통장이라고 하던데, 저쪽은 인민반장이라고 하거든요. 인민 반장이 대동을 해요. 그래서 인민반장이 집을 싹보고 다른 게 없으면 1층 이후 돌아가면서 집집마다 집을 두드리고 들어가죠. 들어가서 “이집에 누가 없냐. 오늘 너희 집에 손님이 온다고 들었는데, 한명이 온다고 했는데 왜 두명이냐” 이러고 와서 따지기 때문에 어떤 때는 설명을 하기가 시끄러우니까 막 농작 속에 들어가서 숨고 베란다 나가 숨고, 이런 적도 많았고요. 그리고 북한은 정보를 제대로 섭취할 수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외부정보에 대한 갈등이 많으니까 그걸 해요. 가까운 사람들이 유에스비, 씨디를 통해 남한드라마라던가, 다큐멘터리라던가 콘서트 이런거 많이 보거든요. 그런데 그걸 보면 기계가 있어요 보위부에. 기계를 쭉 들고 다니다가 어느 집에서 딱 보는 것 같다. 그러면 기계에 딱 잡힌데요. 그러면 기계를 들고 보는 것 같은 집 앞에 딱 왔서 멈췄어요. 그러면 문을 발로 두드리고 손으로 두드리고 하는 거예요. 그럼 그걸 보는 사람들은 심장이 멎는거죠 안에선. 그 다음에 완전 전쟁이죠. 어디다 감추고 문을 안 열어요. 낮에는 무조건 문을 안 열어요. 그러면 딱 안에 있는 것 같다 하면 문을 막 따고 들어올 때가 있어요. 승인도 없이 ‘무조건 얘네 안에서 나쁜 짓 하는 것 같은데 문을 안 연다’ 싶으면 부수고 들어옵니다. 일단 문을 열어주는 경우에는 “뭐를 봤지?” 하고 물으면 “안 봤습니다.” 그러면 “진짜야 진짜야?” 하고 묻더니 “뒤진다, 가택수색 한다.” 하면 “하십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뒤지는거죠. 그게 바로 가택수색인데, 농작 등 아주 다 뒤져요. 그러다가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막 천장을 째고 정말 깊이까지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다가 주인들하고 뭔가 의사소통이 되는 경우가 있죠. 여기서 의사소통이라는 게 뇌물이죠. 뇌물 받고 물러가는 사람들도 있고, 근데 가택수색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 자체가 가택수색이 목적이 아니라 뇌물이 목적이에요. 그 사람들도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뇌물이면 다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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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장은 얼마나 하시나요?

    김치 할 때는 한 500kg 거의 1톤씩. 거기 식량이니까. 겨울에 배고플 때는 밥은 조금 넣고 김치로. 여기는 냉장고로 하지만, 거기는 땅으로 해서 김치가 엄청 맛있어요. 김치를 그저 500kg씩 하고 또 잘 사는 사람들은 돈으로 해서 배추를 많이 사가지고 김치를 또 하고, 그리고 김치 도둑맞는 사람들도 많아. 밖에다 많이 해놓거든. 심지어 그래서 처음엔 김치를 해서 눈에 맞으면, 이런 거 막 해놓고 마지막엔 판자로 다 이렇게 해서 김치를 넣고 거기다가 열쇠 잠구고 그랬어. 도둑맞으니까

    적금도 하셨나요?

    적금할 돈이 없지. 그런데 그 때 나도 한번 적금했다가 하나도 못 찾았어요. 그 전에는 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은행거래라는 게 크게 없었어요. 그건 공장 기업소에서만 기업소 부기들, 공장 관리 때문에 부기원이라는 게 따로 있었거든. 그 사람들이 은행거래하고 이랬지. 개인들은 은행 거래라는 게 크게 없었거든. 한 달 로임 타잖아요. 월급 타는 거, 부기원이 가서 은행에 가지고 와서 우리 사람들한테 직장별로, 작업반별로 나눠주면 통계원이 나눠주고 이랬지. 개인들이 부기 은행 거래하는 건 없었거든.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다 공급제니까, 매달마다 한 달 한 달 살 꺼 다 주고, 한 달 살 것 돈으로 주고 그다음에 사회적으로, 종합적으로 주는 게 많으니까 그때는 그런 게 예입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지. 지금은 개인이 돈을 먹고 있고, 은행에다 돈을 아니 넣는다고 합니다.

    장마당 생활은 어떠셨나요?

    북한에서는 애기 포대기라는 게 있어, 애기 포대기라는거 가지고 나와서 팔면, 5원 떨어지면, 그거 가지고는 하루 먹고 살기 힘들지. 그저 5원 가지고는 하루 한 끼 사면 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다나니까 고난의 행군 시작되니까 그걸 가지고 국수 싸면 두 끼를 먹고 국수도 여기서처럼 껄껄하겐 못 먹고 강냉이 국수, 중국에서 같은 국수는 매끈매끈해. 북한에서 국수는 그 때 그랬거든. 껍질까지 다해서 국수라는게 완전히 껄껄하지. 그래도 그때는 그게 맛있었어. 여기 꺼하고는 대비되지만. 그걸 가지고 국수해선 절여 먹지는 못하고 물에 좀 담가 놔요. 끓인 다음에 붉어가지고 불어나잖아, 불어나면 거기에다가 헐럴하게 해가지고 물을 좀 이렇게 해가지고 그릇을 놓아서 먹어봤어. 둘 서이 그릇도 그리고 통 강냉이 가루 사서 먹어도 보고. 지금 생각하면 나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 가지고.

    약은 어떻게 구하시나요?

    무상치료제라 하지만은, 정부에서 그러는 무상치료제는 일단 맞아요. 무료가 맞긴 하는데 문제는 병원에 가면 약이 없으니까 시장에서 장사로 약이 다 있으니까, 시장에서 무얼 사오라고, 수술하는데 무슨 약이 필요하다고 하면 싸가지고 오지.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일단 먼저 여기로 말하면, 꿔가지고 오지. 나를 먼저 꿔 달라 이래가지고 먼저 쓰고 ‘내 어떻게 물어줄게’ 바꾸니까.

    약 판매하는 거 불법이 아닌가요?

    원래는 안 되는데 시장에서 단속은 해요. 단속하는데 약 같은거 처음 우리 있을 때는 단속했어. 그러니까 아스피린 판다고 하면 아스피린 한 두 개 쥐고 있어. 1~2개 이렇게 쥐고 왔다 갔다 하거든. 무얼 요구하는가. 이레 물어봐가지고 어떤 것을 요구한다고 하면 집에 데리고 가지. 공개적으로 내놓고 못 팔았어요. 단속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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