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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가로등

"어머니, 중국 가로등은 하얀데 우리 가로등은 왜 까맣나요?
선생님이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고 위대한 나라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나요?"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에게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
왜 그 땅은 가로등이 까만지 네게 제대로 설명도 못해주던 엄마는
지금 하얀 가로등이 가득한 이곳 한국에 와 있어.

01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양강도 혜산, 나와 너의 고향

양강도 혜산, 너도 그곳에서 태어났단다.

엄마는 친가, 외가 둘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맏딸이 금딸이라고, 첫번째 손녀로 태어나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었지.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내가 사랑하는 음악, 북한의 예술인으로서의 삶

엄마는 스스로 삶을 돌이켜 봤을 때, ‘음악’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라.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예술 분야를 강조하던
시기에 엄마는 유치원부터 예술 대학까지 음악을 하게
되었단다. 음악이 좋았고, 노래 부를 때 진심으로 행복했지.

하지만 엄마의 노래 방식이 북한의 주체 예술 창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노래를 하는 동안 항상 비판을 받았었단다.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나를 믿어주는 선생님과의 만남

이것에 대해 고민을 하던 나는 예술 대학에서 지금 엄마와 함께
탈북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단다. 선생님은 항상 북한식 주체
창법을 쓰지 않는 엄마를 믿어 줬고, 모두가 반대하던 콩쿠르를
데리고 나가 주셨고, 항상 옆에서 힘이 되어 주셨지.

"너를 1등 주지 못하는 교수들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야 돼.
우리 정치체제가 그렇게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1등이라고 생각하자”

“선생님 전 선생님에게 반했습니다. 솔직히 선생님 싫어했었어요.
하지만 이젠 선생님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대남방송 부대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다

이후에 나간 경연에서 꿋꿋히 엄마만의 창법으로 우승하여 평양에
있는 대남 방송 부대로 배치 받고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었지.

하지만 꿈 같은 곳에서의 시간이 1년 정도 지났을까? 2000년에
6.15 남북 공동선언이 채택되고 난 직후, 남북한이 서로를
비방하거나 헐뜯는 모든 행위를 중단한다는 약속을 해서 엄마가
있던 전자악단도 해산이 되었단다.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양강도로 돌아오다. 너와의 만남

그렇게 엄마는 다른 부대로 배치되기를 기다리던 중 고향에
갔다가 너희 아빠를 만나게 되었지. 평양에서 노래부르던
맏손녀가 양강도에서 군복무하는 어떤 놈이랑 눈 맞았다는데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시겠니. 결혼하기까지 참 험난했어.

또 북한은 군에서 제대를 하려면 마땅한 이유가 필요했으니
엄마가 양강도에 내려오려고 같이 따라 내려온 정치 지도원도
속이고 할머니까지 속여가면서 양강도로 돌아오게 되었어.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지나 엄마와 아빠는 결혼했고, 꿈에도
잊지 못하는 너를 가지게 되었단다.

서울에서 양강도로, 이 이야기가 너에게도 닿기를

불행의 시작

그렇게 나름 행복하게 살던 우리 가족이었지만 그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지.

2009년 말 북한 화폐개혁 정책이 시작되면서 중국과 북한
전역을 오가며 장사를 하셨던 외할머니의 사업이 하루 아침에
망해버렸단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북한 돈이 집안에 산 처럼
쌓였었어. 지폐에 그려진 김일성이 얼굴 때문에 처리하기도
곤란했지.

02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물에 걸린 고기 “내가 아니라 이 나라가 문제다”

엄마가 고향에 있을 때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단다.

“강에 물고기는 많지만 그물에 걸린 고기가 죽는다”

말 그대로 북한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엄마가 걸려든 거지. 일부러 불평 불만을 하려고 한것도 아니고
그 땅에 살면서 느끼는 그대로 얘기를 했을 뿐인데 그게 보위부
귀에 들어간 것 같았어.

집중적으로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장사를 한다며
중국 핸드폰을 매일 이용했으니 사단이 날 수 밖에... 게다가
외할머니가 장사를 하시면서 중국 쪽에서 받지 못한 돈 액수가
상당히 있었던 것 같아. 치매가 심해지기 전부터 외할머니는
그 돈을 받겠다고 중국에 전화를 하곤 하셨지.

그런데 그 통화 내용을 보위부에서 도청한 것 같았어. 중국 쪽
상대방이 외할머니에게 돈을 안 주려고 별 소릴 다 한 거야.
그 중에서는 외할머니를 북한 보위부에 신고하겠다는 협박까지
있었던 것 같았어.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감시망이 좁혀오다

그렇게 우리 가족을 감시하던 보위부는 확실한 물적 증거를
쥐고 우리를 다 잡아가기 위해서 엄마의 선생님까지 이용하려
했어.

총 멘 군인들이 선생님을 군 보위부로 데려가 "당신 제자는 이제
교양개조 할 단계가 아니다. 나쁜 물이 너무 들어 이제는 단두대
이슬로 사라져야 한다. 그러니 선생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라고 말하면서 평양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는 선생님 아들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엄마를 감시하라고 선생님을 협박했대.

선생님은 보위부의 조사를 받고 나오셔서 엄마에게 “너희 집에
도청이 돼있으니 집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고
말해주시면서, 오히려 이 땅에서 도망가야 한다고 하시며 엄마를
끝까지 지켜주셨어.

그러다 어느 한날은 엄마가 선생님 집을 찾아갔을때 "왜 왔니?
나 또 보위부 끌려가게 하려고 왔어?"라고 별안간 성을
내신 적도 있었어.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감시망이 좁혀오다

엄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구나.
"선생님, 선생님까지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내가 죽어서 이 땅에서 없어지면 선생님이랑
친구들 모두 다 편안한가요?" 그러면서 펑펑 울었어.

선생님은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며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가 뭘 잘못했겠니? 결국 이 나라가 문제인 거야. 미안하다.
내가 괜히 너에게 성을 냈구나." 라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엄마는 한참을 울다가 퍼뜩 개닫게 되었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이나라가 문제고,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고.하지만
엄마는 지금 우리가 보위부 손바닥 안에 있는데 내가 지금
뛰어야 벼룩이라는 생각에 뭔가 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간을 좀 더 가졌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위부가 집에 쳐들어 왔어. 선생님을
비롯한 엄마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포섭하려고 했지만 이 마저
전부 실패하니 직접 엄마와 아빠를 잡아간 거야.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결심

2013년 1월, 아빠와 엄마는 그렇게 보위부에 끌려갔어.

아들아, 엄마는 살면서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꼽으라면
그 중 하나로 보위부에 끌려갔던 순간을 꼽을 것 같아.

엄마는 그 때, 3일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보위부 구류장
독감방에 갇혀있었어. 손끝부터 발끝까지 감각이 없어지면서
내가 어디에 왔는지도 모르겠더구나. 3일만에 드디어 누군가
엄마를 찾아 왔고, 취조실에서 반성은 잘했냐고 묻는 거야.

“왜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어?”
“무슨 나쁜 짓이요?”

그 간부는 날짜별로 중국과의 통화, 한국 드라마 시청, 한국
노래부르기 등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얘기하더구나.

그러면서 네 생각이 가장 먼저 났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반역자의 자식으로 낙인이 찍히면 분명 살아도 죽은 목숨이
되는 거니까. “이래 죽고 저래 죽을 바에는 차라리 아니라고
하고 죽자” 고 결심했어.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남편의 희생

하지만 다행히도 엄마의 버티기 전술이 통했는지 일주일 정도
조사를 진행하더니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닌
것같다고 이야기하더구나. 실제로 엄마는 간첩도 아니고 임무
같은 거 받은 적은 더구나 없었어. 그냥 북한 주민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갖고 사는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이지.

하지만 일단 자기들이 우리를 데리고 온 이상 누구든 책임은
져야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정치범에서 경제범으로
신분이 전환되었고, 아빠가 엄마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본인
스스로 죄를 다 뒤집어 쓰면서 아빠만 감옥에 가게 되었단다.

보위부 철문 밖으로 나오면서 엄마는 울었단다. 너희 아빠를
저 안에 두고 나올 수밖에 없는 사실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집에 돌아와서도 너희 이모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 앞에서
또 울었어. 감방 안에서 사람이 먹을 거라고는 상상이
안 되는 걸 먹고 있을 너의 아빠 생각에.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엄마의 죽음, 작은 행복마저 묻어버리다

그렇게 엄마 혼자 밖으로 나온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감방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네 아빠는 혼자
많이 울었다더구나. 너무도 많은 사랑을 주신 장모님의 마지막
길도 보지 못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니….

어린 네 손을 잡고 산에 올라 외할머니를 땅에 묻던 날,
네 아빠가 갇혀 있던 감방 건물을 바라보던 그 날을 엄마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네가 태어나서부터 너를 중심으로 우리 집안은 더없이 행복한
가정이었어. 물론 자유가 억압된 북한의 기준에서…. 하지만
우리 가정의 그 작은 행복마저 엄마는 너의 외할머니와 함께
보이지 않는 땅 속 깊숙이 묻어버렸단다.

엄마가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떠날 유일한 기회

너희 아빠가 보위부 예심을 받고 6개월 노동 단련형기까지
다 해서 15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와 몸 회복을 돕고 있던
어느 날, 선생님이 찾아오셨어. 선생님도 우리가 잡혀간 3일
후 보위부 감옥에 잡혀가셨던 거야.

선생님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내가 감방에 들어가
있을 적에 한방에 있던 아이들에게 왜 잡혀 왔냐고 물어봤어.
그런데 말도 안되는 일로 잡혀왔더라. 내가 사는 땅이 이렇게
한심한 땅인지 몰랐다. 이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그리고 선생님의 얘기를 듣는 순간 그 땅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단다.

엄마는 먼저 중국에 나가서 받아야 할 돈들도 받고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빠와 너를 데리고 올 생각이었어. 아빠와
엄마 중 누구라도 먼저 고리를 끊어야 그 땅에서 풀려날 수
있을 테니까.

03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아빠의 도움으로 열린 길

마음의 준비를 끝낸 엄마와 선생님은 막상 떠나려고 보니
확실히 탈북 루트를 정해야 했어. 다행히 너희 아빠가 국경
경비대 군인들하고 친분이 있었거든. 그래서 아빠에게는 중국에
건너가 상품이나 돈을 다시 받아올 수도 있고, 친척들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경제적 재생이 가능할 거라고 거짓말을 했단다.

아빠는 아들에게 미쳐있는 엄마가 너를 두고는 어디에도 못 갈
거라고 생각을 하고 결국 국경 경비대 중대장에서 연락해서
길을 터주게 됐단다.

그런데 엄마는 이 얘기를 아빠한텐 말할 수 없었어. 선생님도
가족에게 말 못하긴 마찬가지셨지.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잡히면 그야말로 다 끝나는 거니까,
먼저 위험을 감수하자고 결심을 했어.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너의 마지막 모습

“예, 어머니 잘 갔다 오세요!”
“엄마가 돈 좀 벌어가지고
며칠만 있으면 오니까
그 동안 이모 말 잘 듣고 있어”

아들은 기억할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엄마는 생생히
기억한단다. 2014년 9월 27일 12시 30분경, 아파트 현관에서
마주했던 너의 모습을…

마지막에 네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그 날 아침
너를 학교에 보내고 네가 점심밥 먹으러 집에 오기 전에
나가려고 했는데 그날 따라 네가 집으로 빨리 온거야. 아파트
현관에서 네가 “어머니!”하면서 달려와서 나를 꼭 안더니 어디
가냐고 물었지.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그렇게 짧은 포옹과 몇마디 말을
끝으로 이별을 하게 되었단다. 그 때 본 네 얼굴이 엄마의
꿈속에 자주 보인단다.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처음 딛은 북한 밖 세상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선생님과 손을 꼭 잡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니 겁도
조금 나더구나. 하지만 일단 내딛은 발길은 멈출 수가 없었지.

강을 건너다 구덩이에 빠져 죽을뻔한 고비도 한 번 넘기고
결국 무사히 강을 건너 중국 쪽 도로에 올라 섰어. 그리고 도로
옆에 보이는 갈대밭 같은 곳으로 몸을 숨겼지. 우리를 마중 온
사람들을 만나서 옥탑방 같은 곳에 도착해 선생님이 감옥에서
알게 된 여성을 기다리게 됐지.

기다리는 동안 아빠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옆에 네
목소리가 들렸어. 그때 엄마가 몇 번 피아노 치면서 불러봤을
뿐 너에게 한 번도 가르쳐준 적 없는 노래를 불러줬지.

아들아, 엄마는 중국이라는 그 낯선 땅에서 심장을 졸이며
있으면서도 네가 불러줬던 그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단다.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아빠와의 마지막 통화

그러던 중 이제 북한에서도 엄마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감시가 다시 붙었단다. 그때서야 아빠도 이모를 통해서 엄마가 탈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여보 나 당신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당신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나한테 왜 이래?”

그게 아빠하고 나눴던 마지막 통화였어.엄마가 강을 건너던
그 날 “여보, 왜 당신을 다시는 못 볼 거 같은 기분이 들지? 내
예감이 틀린 거겠지?”라고 말하던 너의 아빠, 바라보던
그 얼굴을 잊지 못해. 미안하고, 또 미안했어.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진퇴양난에 빠지다.

엄마는 참 간단하게 생각했던 거야.
중국에서 받아야 할 돈을 받거나 친척들 도움을 받으면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진퇴양난에 빠진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족을
움직일 수 있는 돈도 마련할 수 없었어.

왜 그런 말 있잖아,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정말 말 그대로 북한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걸
중국 땅에서 느꼈단다. 떠나고 싶지 않은 고향을 뒤로 하고
타향살이를 선택한 사람들의 곡절 많은 운명, 그 서럽고 억울한
마음을 아마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다 모르겠지. 그렇게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남한이였고, 우리의 남한행이 시작됐단다.

아들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탈북 과정

자유롭게 날다.

아들아, 엄마는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그만큼 우리
아들과 멀어지는 것 같아 매일 마음속으로 울었어.

중국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생사가 달린
남한행이였지만 행운이 함께 해준 덕분에 태국까지 안전히
도착할 수 있었어. 메콩강을 건너 태국의 도로에 올라선 순간
우리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만세를 불렀단다.

아들아, 엄마는 태국 난민 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을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드디어 세상을 다 볼 수 있는 자유를
찾았다는 가슴 벅참이 엄마를 흥분시키더구나.

하지만 그 벅찬 감정 바로 다음엔 큰 돌이 가슴을 억누르는
것처럼 답답했어. 바로 너와 네 아빠 생각때문에. 엄마 귓가에는
네 목소리가 계속 맴돌았어 “어머니 빨리 오세요”

04

결말

결말

까만가로등

예전에 어느 날 오후, 너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오던 길에
압록강 둑을 따라 산책을 했던 적이 있었어. 그 때 중국 쪽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는 거야. 하지만 북한 쪽 가로등은
켜지지 않았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네가 엄마한테
물었단다. “엄마, 선생님이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위대한 나라래요. 근데 그 말이 맞나요?”

너의 그 질문에 엄마는 입이 굳어졌어. 어떻게 대답을 해
줘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말했지.

“선생님이 말씀하셨으니까 맞겠지. 왜 그걸 엄마한테
확인을 하니?”

“근데 엄마, 중국 가로등은 하얀데 우리 가로등은 왜 까매요?
난 하얀 가로등이 좋은데 중국은 저렇게 환하게 전기불이
들어오는데 우리는 온통 까맣잖아요. 전기불도 안 들어오는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예요?”

결말

엄마를 깨우쳐준 너

마음속으로는 ‘아니야,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정말 진심 없는 대답을 네게 해
주었지.

“그런 거 의심하면 안 돼.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다 맞는 거야.
의심하지 말고 선생님 말씀 그대로 들어야 된다.”

막상 말하고 나니 사랑하는 아들 앞에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들었어. 엄마가 자식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땅,
또 그 거짓말을 믿으라고 할 수밖에 없는 땅. 너의 천진난만한
그 물음은 엄마를 거짓이 판을 치는 그 지옥 같은 땅을 박차고
나오도록 영감을 주고 힘을 줬단다.

우리 아들이 엄마를 깨우쳐 준거야. 엄마의 남은 인생도
그 땅에서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적어도 너에게 만큼은
거짓말을 하면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들리는 대로 듣고 표현 할 수 있는 땅으로 너를
옮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날 이후부터 엄마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항상 그 땅을 탈출할 기회를
찾았던 것 같아.

결말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에게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해.
왜 그 땅은 가로등이 까만지 네게 제대로 설명도 못해주던
엄마는 지금 하얀 가로등이 가득한 이곳 한국에 와 있어.

하지만 아들아, 엄마는 널 버린 적이 없단다. 너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아픔을 헤아려주길 감히 바래본다. 더불어 그 땅의
모든 아픈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넓고 깊은 사람으로 자라길…
우리 가족만이 아닌 현시대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은 그 땅의
불합리한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해주렴. 엄마가 지어준 네이름의 의미이기도 하다.

아들아! 우리는 언젠가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엄마는 확신해.
그때 우리 서로 하지 못한 많고 많은 이야기들을 끝없이 나누며
행복하게 웃어보자. 그날을 그리며 엄마는 오늘도 힘내서 살아가.

선생님을 돌보고, 책을 출판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노래를 하고, 공부를 하고, 저축을 하고,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꿋꿋이 버텨나가고.
이렇게 그녀의 사랑과 삶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확신하고 기다리면서.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며,

지금도 남아있거나, 미지의 여정을 떠날 수밖에 없어
헤어진 수만 명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