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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여정" 은?

지금 우리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딛는 북한이탈주민이 되어,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갑니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북한이탈주민은 3만 3천 여 명.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저 마다 다르지만, 이 두 가지만은 같습니다. 어디로 나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 그 여정의 단 한 걸음도 순탄치 않다는 것.

지금 우리는 3만 3천 여 개의 발자국을 따라, 미지의 여정을 떠납니다.
이 길을 걸으며 북한과 북한 주민들의 삶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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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지역 남성 사례

나는 함흥에서 축구를 꽤나 잘하기로 소문난 18살이다. 18살이 되면 남자들은 공화국 수호를 위해 모두 대부분 군대에 간다. 공화국을 수호하는 것은 인민들 모두의 숙명이자 영광이지만 10년을 가족들과 떨어져야 한다니 앞이 깜깜하다. 그렇게 나는 입대를 했고,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만 갈 수 있는 앞지대에 배치되었다. 동무들보다 체격이 덜 야위었다는 점도 검토되었겠지만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공화국에 더욱더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더욱더 혁명적으로 조국 수호에 임하기로 붉게 결심했다. 그렇게 나의 군 생활은 남조선 바로 앞 개성 최전방 부대에서 시작되었다.

적진이 바로 앞인 만큼 많이 긴장되었다. 밤이 되면 남조선 철책의 불빛들이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우리 초소들까지 닿았다. 언제 적들이 넘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긴장해있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손에 50년이 넘게 닿지 않았던, 지뢰와 불발탄들이 깔려있는 그 위험한 지대를 그렇게 쉽게 넘어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선임들이 남조선 아새끼들 종종 칼 들고 우리 목 따러 내려온다고 얘기했지만 장난 섞인 말투였다.

그렇게 기나긴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직면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고 열악했다. 특히 군부대의 생활 여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실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씻을 수 있었다. 이들이 들끓었고 옴이 올라왔다. 위생도 위생이었지만 가장 힘든 것은 먹는 것이었다. 최전방 부대라는 이유로 그나마 우리 부대는 이팝에 거의 다 썩어 들어간 무를 소금에 절여주었다. 이렇게 생활환경이 개판이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공격적이고 부대 내의 부조리가 정말 많았다. 가장 힘든 것이 폭행이었다. 조금만 짜증이 나도 내 선임들은 나를 말 그대로 두들겨 팼다. 아무 이유 없이 맞는 것이 다반사였다. 먹는 것을 빼돌리고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간부들, 그걸 믿고 화풀이로 나를 두들겨 패는 선임들. 왜 허약으로 죽는지, 스트레스로 자살하거나 맞아 죽어서 나가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병들어갔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티며 근무를 섰다. 초소 근무를 나가면 남조선 삐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삐라 봉투 속에 달러가 있다고 들었는데 달러는 없고 장군님을 욕하는 사진과 문구들만 가득했다. 그러던 와중 남조선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이며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남조선으로 건너오라는 삐라를 보게 되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남조선 삐라의 내용은 장군님이고 공화국이고 뭐고 잘 산다는 것에 내 눈앞이 흐려지게 했다.

개성에서 근무하다 보면 남조선의 철책과 파주 근처의 남조선 아파트와 마을들이 잘 보였다. 항상 밤에는 불이 너무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을과 도로 위에 차들이 다니는 것들을 볼 수 있고 내가 근무했던 초소에서는 남조선 주택의 텔레비전 스크린이 커져있는 것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공화국은 남조선에서 볼 수 있는 지역에 위장 마을을 건설하여 설계된 공화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조선 역시 전방 지역을 위장시켜 공화국 인민들을 포섭하기 위한 모략을 쓴다고 늘 교육받아왔다. 하지만 밤에 남조선 마을에 텔레비전 스크린이 켜지고 꺼지는 것과 차가 불규칙적으로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위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고는 했다. 그렇게 이미 나는 나도 모르게 남조선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초소 근무를 설 때마다 남조선으로 가기 위한 기회를 나도 모르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본심을 깨닫고 나는 살기 위해 이곳을 탈출해 남조선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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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지역 여성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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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지역 남성 사례

나는 평양의학대학 구강 학부를 이제 막 졸업하여 구강의사(치과의사)가 되었다. 같은 학교 고려의학부에 다니던 고운 아내를 보고 첫눈에 반해 몰래 교재를 하다가 졸업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 식을 올림과 동시에 아기가 생겼다. 이만한 경사가 있을까, 나의 아버지께서는 당 간부이시고 나는 평양에서 태어나 공화국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성장했다. 공화국의 사정은 힘들지만 우리 가족은 화목함을 기반으로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나는 공화국 인민들의 건강증진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왔다. 교수님을 따라 지방 군 인민병원, 리 인민병원, 진료소를 순회하며 공화국 의료의 현 상황을 파악해나갔다. 겉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실상은 처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당 국제부 간부이신 삼촌과 아버지께서 나에게 함께 할 이야기가 있다며 부르셨다. 아버지와 삼촌께서는 당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의사를 해외에 파견하는데,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넓은 세상에 나가 타국 의사들과 협진도 해보고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냐며 말씀을 하셨다. 비록 아내와 아이를 공화국에 두고 가야 하지만 많은 것을 배워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해외 파견 의사 명단에 올랐다.

조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치과병원에서 근무하고 모스크바 주립 치과대학에서 연수를 받았다. 로씨야의 구강 대학은 그 크기가 웅장했다. 공화국의 의학 수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발전해있었다. 억장이 무너졌고 더욱 마음을 굳게 가졌다. 그렇게 근무시간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와 병원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병원에 구강암병동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에서 종종 남조선 의사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남조선의 의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이 구역 담당 보위원 동지는 내 토대가 좋아 사상에 있어서는 나를 절대 의심하지 않았고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은 나를 감시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남조선 의학시스템에 대해 물어보고 남조선에서 쓰는 구강학 서적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자 주변을 확인하고 조용히 실습실에 있는 남조선 의사 동지에게 가 말을 걸었다. 남조선 동무는 나를 신기해하는 눈치였고 얼떨결에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가 말해준 남조선 의술은 대단했다.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경악하며 남조선 동무에게 말했다. “동무는 복 받은 줄 아시라요. 우리 공화국 인민들은 의료 재원이 부족해 마취약도 없이 수술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의료 체계도 부실하기에 짝이 없소. 장군님께서는 건강해보이시지만 인민들은 아사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오.” 남조선 의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남조선 서적을 빌려주었다. 나는 몰래 내 자리로 가져와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남조선 의학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 정도로 공화국과 차이가 클 줄은 몰랐다. 나는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이 일이 내 생을 바꿀 일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책을 읽고 있는데 함께 생활하는 유학생 동무가 식은땀을 흘리며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인가 동무?”, “동무, 당장 이곳을 떠나시오. 방금 대사관의 사상 담당 당 부비서와 유학생 담당 지도원이 하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혹시 동무 남조선 의사와 내통하셨소? 동무를 공화국을 욕 보였다는 죄로 체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소.” 그랬다. 해외 파견 고위급들의 행방불명으로 당에서 해외 파견자들을 집중 감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은 들었지만 교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놨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혹은 내가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남조선 의사 동무와 했던 대화를 들은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잡혀 공화국으로 송환된다면 나와 내 가족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불안에 떨며 탈출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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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지역 여성 사례

나는 위대한 공화국 최고의 대학교인 김일성종합대학교 주체철학과생이다. 아버지께서는 경공업성 간부이시다. 늘 원수님께 감사하고 공화국의 발전을 위한 역군이 되기 위해 나는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 미제의 공화국 적대시 정책과 대북제재로 공화국이 많이 힘든 상태라 요즘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으시다. 일이 많이 힘들어 보이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얼굴이 상기되셔서 집에 귀가하셨다.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쉬시더니 털썩 주저앉으셔서는 원수님이 지시하신 과업을 달성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작은 소리로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원수님께서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 투철한 사상과 충성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현재 경공업성의 경제사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셨다. 아버지께서 공화국과 원수님을 위해 노고가 많으신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노고를 덜어드리고 싶다.

책을 가지러 학교에 간 사이 아버지께 손 전화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아버지께서는 지금 당장 평양을 떠나라며 고함을 치셨다. 어제 업무 고충에 대해 아버지께서 이야기하신 것이 보위부의 도청 장치에 걸려 보위부가 물고 늘어질 것 같다고 하신다. 원수님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조금 있으면 가족들에게 모두 체포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미리 첩보를 들으시고 최대한 빨리 나를 살리기 위해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공황상태가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에 있는 달러들을 최대한 많이 챙겨서 공화국을 어떻게든 벗어나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달려가 달러를 숨겨둔 가방 뭉치들을 챙겨서 정리한 후 최대한 빠르게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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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지역 남성 사례

이제 막 제대해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열심히 살아보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배치 받은 직무에 최선을 다하기로 정신을 단단히 했다. 그러던 이튿날 저녁 6.25전쟁 당시 남조선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가 함경남도 함흥시에 침투해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보위부가 접수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졌다. 남조선 괴뢰와 그 잔당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당국의 지시에 따라 보위부는 나와 가족들이 사는 곳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국군 포로 출신인 아버지의 신분 때문에 우리 가족이 조사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친구의 부모님께서 집에 달려와 말씀해 주시던 그 순간에 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끌고 갔다. 조사에 들어가면 성하게 못 나올 것이라는 말씀과 남은 가족들도 함께 끌려갈 것이라며 친구의 부모님께서는 당장,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하신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두고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 같이 보위부 손에 죽는 것일까. 아버지를 구하러 내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동생과 어머니는 먼저 탈출시킨다. 그렇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함흥 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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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지역 여성 사례

오빠의 탈북 소식이 보위부에 들어갔다. 때문에 남은 가족 모두가 함경남도 허천으로 추방을 당했다. 추방된 후 남한에 있는 오빠가 사람을 보내어 남은 식구들을 탈출시키려 했다. 한국행을 결심하지만, 가족들이 함흥을 떠나는 날 나는 북한을 떠날 수가 없어 도망쳤다. 북한에 남아있는 남자친구 때문에 한국행을 포기한 것이다. 가족들이 보고 싶고 걱정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남자친구 집에 며칠을 숨어 지냈다.

하지만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일까. 외화벌이 차 중국을 다녀온 남자친구가 남조선 드라마가 담긴 CD 알을 밀반입한 사건에 공개총살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2월 17일 눈이 솜털처럼 흩날리는 그날. 회상구역 평수동 장마당 근처에 있는 강변에서 군에서 10년을 복무하고 제대하여 이 조선에서도 잘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던 29살 청년이었던 그는 조국의 체제를 위협했다는 죄명 하에 그렇게 총살당했다. 피눈물이 났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 나는 아무런 미련 없는 이 끔찍한 조선을 탈출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일단 함흥을 벗어나야한다.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을 보따리에 싸서 떠난다. 나는 돈도 한 푼도 없어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는 산을 타고 북쪽 국경으로 올라가는 방법이 유일한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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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지역 남성 사례

나이 38세, 건설노동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고난의 행군 기간 굶어가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 나서셨다가 산에서 떨어져 실족사하셨다. 어렸던 막내 여동생은 결국 기근을 버티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고난의 행군은 아버지와 막내 여동생을 우리의 곁에서 데려갔다. 둘째 남동생은 앞지대로 군 복무를 하러 간지 2년 만에 허약에 걸려 뼈만 남은 채로 (보안원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집에 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뼈만 남은 몸은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왼쪽 눈동자뿐이었다. 동생을 들것에 데리고 온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들도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동생의 모습을 보시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신 얼마 뒤 눈을 감으셨다.

배급은 끊긴지 오래. 나는 한 사람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적어도 내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자라도록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다. 우리도 남조선으로 간다.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으며, 물살이 빠르지 않아 얼음이 깨진다고 해도 도강하기 안전한 지역이 있다. 그 지역이 포함된 구역을 관할하는 국경 경비대원에게 돈을 지불해놓고 약속된 기간, 불빛이 없는 새벽에 도강해야 한다. 압록강 건너편까지의 길이는 60m 남짓. 그 짧은 60m 경계로 전혀 다른 세상이 있으며, 그 선을 넘기 위해서는 가족 전체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 건너자마자 아버지께서 알고 지내시던 조선족 분의 집으로 최대한 빠르게 숨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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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으로 가려면 내 눈앞의 철책 3개를 넘어야 한다. 첫 철책에는 220v가 마지막 철책에는 2200v의 전류가 흐른다. 2200v의 전류에 사고로 튀겨진 병사들 이야기는 종종 들려온다. 몸이 철책에 닿는 순간 전류가 흘러 신체의 한 부분이 포탄 터지듯이 터져서 튕겨나간다고 들었다.

마침 불어닥친 태풍으로, 나무들이 쓰러지고 장비들이 무너졌다. 철책들도 전부 쓰러지고 부러진 나무에 더 파손되었고 부대 전체가 성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경계 근무는 서야 했다. 선임들은 늘 그렇듯 근무 시간에 숙면을 취했다. 초소 근무를 서다가 태풍 때문에 내 관할 구역 전기 철책의 전류가 끊긴 것을 확인했다.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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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나 전류가 흐르지 않을지 무서워 눈을 질끈 감고 철책을 발로 밟았지만 역시 느낌이 맞았었다. 태풍 때문에 고장이 나서 전류는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왜 이 철책을 넘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전류가 나간 철책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얼른 그것을 넘어 아래로 이동했다. 선임들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인지, 쫓는 발소리 하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풀숲으로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갔다. 신중하게 그리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다음 걸음을 밟으려고 할 때 머릿속에서 번개를 맞은 것처럼 번쩍했다. 철책을 넘어 숨겠다고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간 꼴이었다. 다행히 지뢰는 터지지 않았지만 지뢰가 생각난 순간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아서 남조선으로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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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골짜기가 뻗은 방향으로 계속 달렸다. 다행히 지뢰하나 밟지 않았다. 저 멀리 밝은 불빛이 보였다. 우리는 지금 전깃불을 켤 수조차 없으니 저기는 남한일 것이다.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멈추라! 움직이지 마라!”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젠장. 골짜기를 따라 공화국 철책, 초소와 수평으로 계속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타구역 초소 경비병에게 움직임이 발각된 것이었다.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그 1초의 판단이 내 생사를 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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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그렇게 나는 무작정 달려 몸을 던져 엎드렸다. 그러자 내 머리 바로 1m 위로 탄알들이 날아들었다. 날아온 탄알들은 골짜기 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게 약 30여 발이 날아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몸은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하룻밤을 그 자세 그대로 지새웠다. 추격조가 나를 쫓아오면 나는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다. 잠이 들었던 것인지 기절을 했던 것인지 눈을 떴다. 해가 뜨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풀이 움직였다. 누군가가 있었다. 그렇게 풀 소리는 나를 향해 점점 더 가까워졌고 나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챙겨온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렇게 심장이 멎는 느낌과 동시에 소리의 정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끼 고라니였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고 온 총으로 쏴 죽이고 싶었다. 정말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그 새끼 고라니는 나를 보고 놀라 달아났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 번 힘이 풀렸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나는 방향을 다시 잡고 나를 불렀던 초소의 반대 방향으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골짜기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한참을 내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남조선 초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막상 오니까 다가가기 무서웠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렇게 200m, 100m, 50m, 30m 가까이 갔다. 그리고 귀순을 원하는 자들에게 사용하라고 적어둔 호각을 불었다. 탈진해서 힘이 없었다. 호각 소리가 나지 않아 가져온 흰색 비닐을 있는 힘 것 흔들었다. 그러자 남조선 경계병들이 비상벨을 울렸다.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장교와 장병들이 나를 포위했고 나에게 귀순의사를 물으며 말했다.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나는 거리가 약 3km 밖에 되지 않는 DMZ를 24시간을 뚫고 건너와 조선에 도착했다.

실패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철책은 더 강하고 두껍게 복구되었고, 전류는 다시 들어왔다. 전방의 경계근무를 강화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그렇게 나는 다시 기회를 엿보지만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채 군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점점 병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허약에 걸려 쓰러졌고, 후방으로 이송되었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실패

능선은 적군이 침투했을 시에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이동경로 중 하나로 간주되어 온통 지뢰밭이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 내딛자마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나뒹굴어졌고 피가 솟구쳤다. 왼발목이 통째로 날아갔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실패

초소에 나를 발견한 사람과 함께 있던 사람이 하필 보위부 지도원이었다. 보위부 지도원은 나를 끌어올려 심문했다. 그는 완전무장을 하고 풀을 캐러 오는 것이 말이 되냐며 화를 냈고 나를 총구로 내리찍었다. 나는 혹시나 남조선 것들을 마주칠까봐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그랬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화를 내며 통신병을 시켜 내 부대에 알아보도록 시켰고 내 경계근무 시간이라는 것이 적발되었다. 그렇게 나는 보위부에 끌려갔다. 이제 내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추가정보

- 보위부 지도원? ‘보위부’가 뭐길래

보위부는 ‘국가안전보위부’를 말한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 보위규율기관 중 하나로, 우리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하지만 보위부는 북한 특유의 체제보위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차이다. 주로 간첩 및 반혁명분자 색출, 주민들의 사상 동향 감시, 대남 정보업무 등을 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당, 정, 군 그리고 기업소(주민들의 근무지)까지 파견되고 있고, 최말단 지방조직인 농촌의 리 단위, 주민들을 거주지 별로 묶은 단위인 인민반에까지 보위부원을 상주시킨다. 이렇듯 철저한 주민정보망을 기반으로 보위부는 체제유지와 정권 위협요소를 색출 및 제거하는 반탐 활동을 앞장서 수행하고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보위부는 인민반 회의를 직접 소집하여 한국과 연계돼 돈을 받은 주민들에게 ‘불법 송금으로 받은 돈을 보위당국에 바치고 자수하면 선처하겠지만 끝내 숨기면 엄벌에 처한다’며 회유와 협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 관련 동영상: 北 보위부 최소 1385명, 평양 시민 감시 (https://youtu.be/ZG2DStCkbiA)

추가정보

- 전민군사복무제 : 북한에서는 누가, 언제 군 입대를 할까?

정답은 ‘남녀 모두, 중학교 졸업 이후에’. 북한은 2003년 3월 군사복무법을 제정하고 ‘전민군사복무제’(사실상의 징병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남성의 경우 만 14세가 되면 초모대상자(입대 지망자)로 등록해야 하며, 만 15세에 두 차례에 걸쳐 신체검사를 받는다. 이후 중학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병으로 입대한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에, 취업자는 근무한지 3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을 징집 대상으로 한다. 군 복무기간은 남성의 경우 10년, 여성의 경우 7년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는 군대에서 복무한 후에야 노동당 가입이 가능하여 군입대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뒤 북한주민들은 먹고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먹고 사는 것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인식함으로써 과거처럼 입영에 대한 인기가 높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북한은 사실상의 징병제인 전민군사복무제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전민군사복무제’)


- 철책에 고압 전류가 흐른다고?

북한은 철책선을 넘는 주민들을 막기 위해 철책선에 고압전류가 흐르도록 해놨다. 2019년에는 중국 당국이 북중 간 밀수와 불법 도강을 막기 위하여 지린성 훈춘과 투먼 등에 감시카메라와 전기 철조망을 설치하고 있다는 데일리 NK의 보도도 있었던 만큼, 북한 주민들의 탈북 가능성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형국. 그런데 몇몇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이 철책의 운영에 어려움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문제의 원인은 전기 공급이다. 북한의 전력 수급 사정으로 인하여 워낙 전기가 부족해 철책선에 지금은 거의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탈북을 시도하는 북한 주민들은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 막대기나 장갑으로 전기가 흐르는지 먼저 확인하고 사선을 넘어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관련 동영상: ※가장 위험한 탈북※ 휴전선 넘어 온 귀순병.."철조망에 2200V 전기 흘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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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뢰까지? DMZ를 건너는 것은 얼마나 위험할까?

길이 약 250km 너비 약 4km인 DMZ는 지뢰와 가시철사, 수많은 감시카메라와 전기 철조망이 있다. 수많은 한국군과 북한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기에 걸어서 DMZ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북방한계선 철책선인 고압 전선 바로 남쪽으로 수십에서 수백미터의 폭으로 구축된 지뢰지대는 애초애 방어 목적으로 설치됐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탈북자 저지선’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남한으로 귀순하려던 인민군 중에서는 고압철책선까지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지뢰지대에 걸려서 죽어간 경우도 있는 것. 이에 탈북자 대부분은 군사분계선을 택하여 탈북하기보다는 중국 국경을 넘거나 동남아 국가를 거쳐 한국 또는 제3국으로 탈북을 시도한다. 만약 DMZ를 건너 탈북을 시도하다가 북한군에 잡힐 경우, 재판에 넘겨진 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복역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 관련 기사: 김정은 집권 이후, 지뢰 추가 매설된 것으로 확인돼..
2016년 4월부터 북한군은 비무장지대(DMZ)에 근무하는 민경부대의 탈북을 저지하기 위해 판문점 인근에 대인지뢰를 새로 매설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 수량은 4천발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민경부대는 ‘출신성분’이 좋은 인력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남한과 최근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과거에도 탈북이 자주 일어났다. 한일(韓日)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DMZ를 걸어 귀순한 주성일(가명)씨는 대남(對南)방송을 튼다는 것이 잘못해서 평소 듣던 남한 가요를 튼 죄로 처벌받을 지경에 처하자 지뢰가 만연한 DMZ를 걸어서 탈북했다. 2012년에는 한 병사가 마찬가지로 걸어서 DMZ를 넘어온 뒤 우리 측 초소에 자진신고한 이른바 '노크귀순'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군 장병들의 남한 귀순은 밀로(密路)라 불리는 길을 통해 이뤄진다. 대남공작원 투입로로 사용되는 밀로는 지뢰밭 한가운데에 닦인 길을 말한다. 북한은 밀로 지도를 극비로 취급하지만 종종 밀로 동선을 알게되는 장병도 있다. 북한군은 DMZ 신규지뢰 매설 등을 통해 이 밀로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출처: '밀로(密路)' 사라진 DMZ "北, 신규 지뢰 매설", https://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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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관련 동영상: 목숨 건 DMZ탈북, 그 이후의 이야기들...


- 그런데 DMZ를 넘어 북한으로 간 미군이 있다?

놀랍게도 비무장지대 안에서 근무하던 미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간 사례가 다수 있다. 주한미군은 1968년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이전까지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일부 지역의 경계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중 찰스 로버트 젠킨스 하사는 1965년 1월 음주 상태에서 월북하여, 북한에서 일보인인 소가 히토미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2004년 일본으로 이주한 뒤 2017년 사망하였다. 또 다른 사례로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일병은 1962년 8월 무단외북 후에 중대장이 군사재판에 그를 회부하려 하자 홧김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체로 북으로 간 미군들의 삶은 기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 목숨 걸고 DMZ를 넘어 탈북하는 북한 군인들, RFA, 2020-12-04)

> 관련 동영상 : 주한미군 젠킨스, 베트남전쟁 파병을 가기 싫어서 DMZ를 지나 북한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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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기 전에 당장 떠나야 한다. 일단 공부하고 있던 곳에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때 나와 친분이 있던 남조선 동무가 생각났다. 그가 머무는 사무실로 이동하여 도움을 요청해볼까? 아니면 일단은 공화국 사람들이 있는 학교와 주변 지역을 벗어나 몸을 숨기는 것이 좋을까? 갑작스럽게 마주한 일에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일지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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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의사 동무가 있는 사무실로 가서 당장 죽게 되었으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는 내 얼굴 표정과 말하는 것을 듣더니 자세한 사정을 묻지도 않고 일단 자기 차에 나를 태웠다. 차는 빠르게 학교 근처를 벗어났다. 괜스레 차 밖에서 나를 찾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은 당장의 위험을 피했으니 이성적으로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제 무엇을 부탁할까? 대사관에 구조요청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교수님께 말씀을 전달해달라고 부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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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의사 동무는 나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남조선 대사관에 연락하여 상황을 알렸다. 대사관 직원이 나를 데리러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하며 도움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불안하지만, 일단은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보위부원들이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먼저 찾을지, 남조선 대사관 직원들이 먼저 도착해서 나를 안전하게 데리고 갈 수 있을지 좋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불안함 때문일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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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빠르게 대사관 직원들이 도착했다. 안기부 직원들까지 동행한 것인지 총을 차고 있는 것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차로 인도했다. 다행히 아무도 추격해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남조선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남조선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문이 열리고 남조선 대사관에 들어서자 직원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 안전합니다.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정신이 돌아오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깨달았다. 나는 공화국 의학 발전을 위해 대화를 나누고 의학 서적을 빌려봤을 뿐인데, 공화국에 대한 반역죄라니. 이렇게 남조선으로 가게 되면 나는 내 아내와 가족들을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나는 내 아이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한 아빠가 될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렇게 며칠을 대사관에서 지낸 뒤 나는 나를 보호해 주는 직원들과 남조선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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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도망을 치다가 대사관 사상 담당 당 부비서와 마주쳤다. 왜 통행제한 구역을 벗어나는지 설명하라고 했다. 보위원은 내가 남조선 의사와 접촉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나는 자그마한 방에 구금되어 있다가 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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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의사’도 해외에 노동자로 파견된다?

2013년 기준 북한은 세계 16개 국가에 5만여 명의 북한 노동자를 파견한 것으로 확인된다. 중국과 러시아에 각각 2만 여명의 노동자가 파견되었고, 그 밖에 쿠웨이트(4000~5000여 명)·UAE(2000여 명)·카타르(1800여 명)·오만(300여 명) 등 중동(中東)국가, 말레이시아(400여 명)·몽골(2000여 명)·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 알제리·리비아·나이지리아·에티오피아·앙골라·적도기니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북한 노동자들이 나가 있다. 해외 파견 노동자는 건설노동자, 벌목공, 광부, 어부, 농장노동자, 식당 종업원 등 단순 노동자들이 대다수를 이루지만,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외화벌이 필요성이 강화되면서 의사, 태권도와 무술 전문가, 미술가(화가) 등으로 확장되었으며, 군사전문가(군사고문과 경호요원)와 음악단 등도 파견되고 있다.
이렇게 해외로 나간 노동자들은 외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북한과 거의 차이가 없는 ‘북한 밖의 작은 북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노동자들은 해당 국가에 입국한 직후, 여권부터 회수당하는데 이는 탈출을 막기 위한 조치다. 이후에는 집단 숙소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북에서와 마찬가지로 ‘생활 총화’를 하며 상호 감시하는 생활을 지속한다. 현지인들보다 저렴한 노임, 현지인들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북한 노동자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로 노동하고 있으며, 이렇게 일하며 번 돈 마저도 북한 회사가 각종 명목으로 90% 이상을 갈취하는 착취를 당하고 있다.
(윤여상·이승주, (2015), 북한 해외 노동자 현황과 인권실태, 북한인권정보센터)

> 관련 동영상: [클로즈업 북한] 제재·인권 사각지대…러시아의 北 노동자


한편 RFA의 2016년 기획 보도 ‘북한 해외노동자 시리즈’를 보면, 해외에 파견된 북한 의료진의 열악한 환경 그리고 외화벌이를 위해 불법행위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북한과 오래 전부터 친분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탄자니아는 국립의료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병원이나 약국, 그리고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그러한 현지 상황을 파악한 북한은 지난 1991년부터 탄자니아 전역에 12개의 병원을 세우고 100여명의 의사 및 간호사를 파견해 오고 있다. 문제는 비위생적인 북한 병원의 오진과 약물 오남용 등으로 현지인의 피해가 끊이질 않는다는 것. 심장병에 좋은 것이라며 180시간이나 지속되는 중국제 발기부전제를 처방해주는 사례는 예삿일이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의 원문 기사를 통해 볼 수 있다.
(출처: [연중 기획-북한 해외노동자] ②탄자니아 북한의료원 심장병에 발기부전제 https://www.rfa.org/korean/in_focus/yearlyreport-021920161445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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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상 담당 당 부비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도청으로 들은 것에 대해 캐물었고 교수님의 변호와는 상관없이 남조선인과 비공식 접촉했다는 것 자체도 죄인데 공화국과 장군님을 모욕한 것은 공화국에 대한 반역행위라며 나를 체포했다. 그렇게 나는 구금되었고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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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출을 시도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걸까?

해외 파견 사업장을 탈출해서 현지 경찰 혹은 북한 보위원에 의해 붙잡힌 노동자는 보위원 혹은 당비서의 결정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다. 본국으로 송환되기 전에는 사업소 내의 임시건물에 탈출했던 노동자를 구금시키고, 본국으로 송환할 때에는 도망을 치지 모하게 다리에 부목을 대고 굽힐 수 없게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북한으로 송환 이후에는 경제적 활동뿐 아니라 정치적 활동을 했을 때에도 엄격한 처벌을 적용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기본적으로 해외 파견의 기회는 박탈되고, 출당 여부가 결정되며 조사를 거쳐 본래 소속돼 있던 직장으로 돌려보낸다. 단련대나, 관리소 등 구금되는 처벌을 받기도 하는데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처벌이 내려지기도 한다.

“한국사람 접촉하면 송환시킵니다. 쿠웨이트 사장으로 나왔던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당시 통역이 어떻게 해가지고 국가보위부에다가 쏴서, 중앙당에서 그 사장에게 회의 들어오라 해서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수남 비행장에서 족쇄 채워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근무태만으로 돼서 1년 동안 혁명화, 로동자 생활 1년 동안 했습니다.” (증언자 7, 쿠웨이트, 2010년 파견)

“그런데 도망치다가 잡히면 거기에 안전부가 있단 말입니다. 사업소 안전부 경찰인데 와서 묶어가지요,. 구류장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 가둬놨다가 조선에 보내는데 조선에 보낼때는 환자로 해서 다리 깁스를 해요. 굽히지 못하게 뛸 수도 없고 그렇게 깁스를 해요. 소련사람들한테는 환자라고 하고 보내는 거죠. 북한에 가서는 징역생활을 하던가 정치적 색이 있음 때려죽이고 하죠.” (증언자 9, 러시아, 1970년 파견)

“도망쳤다 하면 이 사람은 족쇄로 묶어서 송환 돼서 아무개 누구 출당이다 말로 동의로 하고 끝내요. 스트레스 완전히 받아요. 직업 다 뺏기지. 시내에 집이 있다 하면 농촌으로 추방당해요. 내가 거기가서 잡혀서 가면, 내 가족까지 나와 똑같이 취급받아요. 형제까지도 같이 잡아 가고. 내가 돌아가서 옆에 사람들 고생시킬 필요 있나요.” (증언자 5, 러시아, 2007 파견)

출처: (윤여상·이승주, (2015), 북한 해외 노동자 현황과 인권실태, 북한인권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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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는 나를 말렸으나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무사히 택시를 탔다. 아직 서투른 로씨아어로 한국 대사관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대사관을 향해 달렸고 택시 기사는 나에게 도착했다는 듯이 손짓했다. 밖의 건물을 보자마자 나는 공황상태가 되었다. 건물 대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이라고 적혀있었다. 택시 기사가 조선 대사관에 데려다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경비병이 택시 문을 두드리며 용건을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나를 심문했고 결국 체포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선으로 송환 판결을 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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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의료와 인권

“한 국가의 의료 정책과 의료 실태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늠하는 민주화의 척도로서 인간은 출생부터 건강을 누릴 권한을 가진다”. UN 세계기본인권선언문은 모든 사람들이 건강권을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이 권리를 현실적으로 향유하고 있을까. 북한의 의료 정책은 ‘무상진료제’를 표방하고 있다. 의사들은 ‘담당구역제’에 따라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는 주민 약 4000명 기준으로 1명의 의사가 주민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으며, 다른 전문과목은 인구 약 1000명에서 5000명당 1명의 의사가 담당하도록 되어있다. 시스템만 보면 의료체계에서 소외되는 주민이 없이 진료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려나 1990년 이후 사회주의 경제가 붕괴된 이후로, 무상진료제는 유명무실해졌다는 게 현실. 병원은 진단 기능만 가능하고 치료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이다. 해외에서 지원된 의약품의 경우, 간부의 횡령이나 실무자의 도용 또는 도난사고 등으로 주민들에게 거의 제공되지 못한다, 이에 일반적인 북한 주민들은 자체 재배하고 생산한 고려약품을 주 의약품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이 마저도 한계가 있다. 북한 주민의 기대 수명이 ‘70.6세’(2015년, UN 작성 기준)으로, ‘82.1세’인 남한 보다 10세 이상 낮은 것은 이러한 북한 의료정책 및 체계의 한계를 방증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 관련 동영상 : “환자가 병원으로 직접 약을 사온다?” 의대생이 직접 본 북한 병원의 열악한 현실들

> 관련 동영상 2: 北 ‘모성사망률’ 남한의 8배... “열악한 의료체계 개선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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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유학생은?

>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김00 졸업생의 증언 : “베이징대 예과반 수학 중 북한 학생과 같은 반에 배정 되어 1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을 같이 동문수학했습니다. 당시 그 북한 친구는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북한 인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최신 스마트폰과 일반 학생 수준 이상의 외식 문화 그리고 외국의 문물이 전혀 낯설지 않은 신세대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당의 지령에 따라 자신의 선택 전공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높은 성적을 받고 있어서 광화관리/경제/국제관계 등 상위 학과를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의 전화 한 통에 고고학과로 과감히 과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이징대 국제관계학과 학부에 입학하고 나서 교내에서 북한 학우들과 조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베이징대 국제문화제 당시 북한 부스를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국제문화제는 세계 각 국의 유학생들이 모국 문화를 홍보하고 체험할 수 있는 베이징대 최대 행사 중 하나입니다. 국제문화제 당일 우연히 북한 부스를 방문했습니다. 북한 부스는 북한 문화 홍보보다는 당의 선전물 홍보에 크게 신경을 쓴 모양새였습니다. 선전 포스터부터 책자 그리고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의 배지까지 문화 홍보 부스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대사관 경호원들이 파견 나와 전시 부스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들은 한국 유학생들이 북한 부스에 접근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경계의 눈빛이 저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축제에 대사관이 개입하여 통제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것을 아무 말 없이 따르는 북한 학생들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북한의 청년들이 하루 빨리 자유를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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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한 탈북

북한이탈주민 중 상당수가 해외에서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해 탈북을 시도한다.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거나 한국 대사관을 직접 찾아와 직원을 찾거나 대사관 문을 두들기며 귀순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한국 대사관의 미흡한 대처에 간혹 논란이 되기도 했다.

> 관련동영상 : 탈출하자마자 대사관행☜ 능력껏 찾아낸 한국대사관


> 북한이탈주민 000 님의 증언 : 대한민국 대사관을 찾아가 직원에게 북한사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직원이 귀순을 원하시는 것인지 여쭤보더군요. 사실 말로만 듣던 남조선은 무섭고 삭막한 곳이기 때문에 처음 대사관 앞에 서있을 때 많이 무서웠고 망설여졌습니다. 제가 귀순의사를 말씀드렸더니, 문을 열고 얼른 들어오시라고 하시더군요. 대사관 내부로 들어가 직원분들을 처음 뵈었는데, 가장 처음 여쭤보신 질문이, “식사는 하셨습니까?”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너무 편해지고 힘이 풀렸어요.
관련 기사 : “탈북자 외쳐도 대답 없는 한국대사관 … 처음 아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706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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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를 통해 도청, 추적될 위험이 높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손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손전화,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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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를 박살내고,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렸다. 몸을 숨기기에는 사람이 적은 곳보다는 많은 곳이 나으리라 하고, 번화한 장마당을 지나 택시를 잡아탔다. 무사히 집 주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가 숨겨두었다 주신 달러 뭉치뿐.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해야 할까. 동무의 집에 숨겨달라고 해야 할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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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에게 평양역으로 가달라고 하였고, 별 일 없이 평양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시민증이 있으니,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쉽다. 국경지대로 곧장 갈 수는 없지만 일단 북쪽으로 이동하여 강을 넘어 중국으로 가는 방법이 있고, 고모가 계신 개성으로 가서 몸을 숨기는 방법도 있다.
기차를 타고 북쪽 국경을 가서 넘어가기에는 너무 먼 길이고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섭다. 개성에 사는 고모네 집으로 도망가 숨어야겠다. 어떻게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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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도왔을까. 선배가 당중앙위원회 간부를 전방 지역으로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에 평양에서 개성으로 이제 막 출발한다고 한다. 나는 선배에게 살려달라며 나를 함께 태워달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평양개성고속도로를 달렸다. 선배의 도움 덕에 수많은 검문소들의 검문을 거치지 않고 통과했다. 차 안에서 밖을 보면서 가는데 눈물이 났다.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엄마, 아빠는 괜찮으실까. 너무 무서웠다. 선배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고모네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흙먼지 날리는 굽어진 길을 달리는 사이, 옆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연백군 연안읍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황해남도 연백군 연안읍이었다. 고모의 집에 거의 다 와 간다. 검문소에 정차하자 검문소 직원이 7.27 차량이 어떤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왔는지 물었다. 발각될까 봐 심장이 뛰었다. 선배가 당 고위 간부의 심부름 차 왔다고 길을 열라고 했더니 도와드릴 것이 있나 해서 여쭤봤다며 바로 길을 열어주었다. 선배는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남조선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고모가 계신 마을에 도착했다. 선배는 꼭 살라며 손을 꽉 잡아줬고 그렇게 헤어졌다.

금방 고모를 만났다.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지금은 오후 5시. 앞길이 막막했다. 고모는 일단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전부 가져오셔서 먹이셨다. 그리곤 눈앞에 보이는 남조선으로 가라고 하셨다. 가장 가까우며 북에서 손댈 수 없는 유일한 곳이라고 하신다. 시간이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만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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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고모와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했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 풀 뭉치를 타이어 위에 올렸다. 숨을 최대한 참으며 들고 뛰어든 타이어 밑에 숨어 남조선 쪽으로 최대한 발버둥 쳤다. 물살이 강해서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발버둥 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포감이 내 온몸을 지배했다. 잠깐 올라와서 숨을 쉬고 내려갔다.

극적인 순간에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더니 정말 숨을 오래 참고 땅과 어느 정도 멀어질 때까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잘 숨은 덕분일까. 경비대의 총격은 없었다. 하지만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 이제 죽는다는 생각이 든 순간! 발이 땅에 닿았다. 해류가 도와준 덕분인가. 한 줄기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계속 올라갔고 그렇게 모래 언덕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봤다. 내 뒤는 조선, 앞은 남조선이었다. 나는 썰물이라 물이 빠져 가운데 생긴 모래섬에 서있었다. 그렇게 다시 몸을 던졌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았다. 온 만큼을 더 살기 위해 헤엄쳤고 팔을 뻗었더니 돌이 만져졌다. 그렇게 나는 “살려주시라요!” 소리쳤다. 남조선 군인들이 다가와 구명튜브를 던져주면서 물었다. “이곳은 자유 대한민국입니다. 표류입니까? 귀순 의사 있으십니까?” 그렇게 나는 하루 만에 평양에서 남조선에 도착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일단 큰 위기는 넘겼다는 안도감과 함께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나면서 또 눈물이 터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꼭 다시 봐야 한다. 정신을 곤두세우고 꼭 살아남아야 한다.

실패

보위부가 손전화를 통해 내 위치를 파악하여 학교에서 평양 외곽으로 탈출하던 도중 체포되었다. 보위부원은 금세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아챘고, 너희 아버지가 말반동을 했는데 너는 무사할 줄 알았냐면서 주먹질을 해댔다. 하룻밤 사이에 평양에서 알 수 없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도착해보니 정치범수용소였다.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지 알 길이 없었고,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추가정보

- 손전화는 뭐지?

북한에서는 핸드폰을 ‘손전화’라고 부른다. 북한의 손전화는 사용자가 무려 580만 명을 돌파했고, 가입비로만 최소 17억 4000만 달러(약 1조 9300억원)의 현금(달러)이 유통되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중앙일보와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와 관련 문건을 공동으로 분석한 결과다. 고위 탈북자의 증언으로는 원칙적으로 1인당 1대의 손전화를 개통할 수 있지만 타인의 명의를 빌리거나 웃돈을 주고 개통해 2대, 3대를 보유한 사람들까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추가 영상 : ‘북한에서 카톡이 가능하다고? 북한의 스마트폰 언박싱’, 동아일보 (북한 스마트폰으로

실패

동무의 집에 숨어들었다. 동무의 부모님이 공범으로 몰릴까 무서워 나를 신고했고 그렇게 나는 보위부에 체포되었다.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면서 호되게 맞았고, 금세 어디론가 이끌려 옮겨졌다. 평양을 평생 벗어나본 적도 없는 나였기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도착해보니 정치범수용소였다.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지 알 길이 없었고,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실패

잘못된 선택이었다. 중앙당의 명령으로 단속이 강화되었고 고속도로에 있는 검문소들의 검문 과정이 오래 걸리면서 몇 개를 무사히 지나쳤지만 5번째 검문소를 지날 때 체포령이 떨어졌다. 나를 수상하게 여긴 보위원이 나를 조사해야겠다며 하차시켰다. 그렇게 붙잡혀 시간이 흘렀고 체포령이 떨어진 뒤 전국 수배령이 발령되어 나를 알아본 검문소 보위원은 나를 체포했다. 나는 이제 죽은 것과 다름없다.

추가정보

- 개성과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

개성은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고 남북관계사에 있어 경제협력이 이루어졌던 도시인만큼 의미가 있는 도시이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평가가 상반된다. 분단 직후에는 남한에 속해있던 도시이며, 남한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산가족 거주 비율이 높다. 고로 주민들 속에는 출신 성분이 낮은 사람들의 비율이 높다.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는 북한의 유일한 아스팔트 도로이다. 북한의 도로 사정은 상당히 열악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에 비해 주요 산업 원료인 석탄을 비롯하여 광석과 비료, 과일 등이 모두 도로로 운반되며, 화물 수송과 여객수송 역시도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패

고모네 집에서 숨어 지냈다.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 고모는 배를 구하기 위해 내가 가져온 달러를 들고 사방팔방을 알아보러 다니신다. 고모네 집에서 지낸 지 3일차 저녁. 고모가 기적적으로 뗏목 비슷한 배를 어떻게 구하셨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떠나려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보위원들이 들이닥쳤다. 이 밤중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이제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체포 명령이 떨어지고 친척들 집까지 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체포되었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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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신분제도와 평양

북한에는 아직 계층이 존재한다. 북한은 사회 구성원들의 계층(성분)을 ‘출신성분’과 ‘사회성분’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다. 이때 출신성분은 한 개인이 출생한 때에 부모의 성분을, 사회성분은 개인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직업 및 사회계급적 관계에 의해 부여받는 성분을 의미한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사회의 계층구조를 새롭게 구성하였는데, 이 때 ‘전쟁의 피해보상’이 계층구조 구분의 중심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피해자가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전사자, 피살자 가족을 사회의 핵심세력으로 등용시키면서 계층구조를 재정비했다. 이 정책을 통해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체제 유지에 대한 인민의 의지는 고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월남자 및 그 가족에게는 정치적, 사회적 체벌을 주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흐름 하에 북한의 계층은 혁명가 가족, 영예군인, 영웅 공로자, 제대 군인 등을 아우르는 ‘핵심계층’과 일반 노동자와 기술자, 농민 등은 ‘동요 계층’, 과거 지주나 자본가, 월남자 가족과 불순분자 및 반동분자 등으로 낙인찍힌 인물들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었다. 평양 주민들은 핵심계층에 속한다. 평양시민들은 모든 배급품을 우선적으로 지급받고,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도 평양시민은 통행증이 필요 없다. 평양 외 지역 주민들은 타 지역과 평양 내로의 이동이 제도적으로 극히 제한적인 것을 고려했을 때, 이는 큰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 내부에는 여전히 신분제도와 그에 따른 큰 차별이 존재한다.


- ‘도청’에 ‘추적’까지 가능하다고? ‘보위부’가 뭐길래

보위부는 ‘국가안전보위부’를 말한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 보위규율기관 중 하나로, 우리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하지만 보위부는 북한 특유의 체제보위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차이다. 주로 간첩 및 반혁명분자 색출, 주민들의 사상 동향 감시, 대남 정보업무 등을 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당, 정, 군 그리고 기업소(주민들의 근무지)까지 파견되고 있고, 최말단 지방조직인 농촌의 리 단위, 주민들을 거주지 별로 묶은 단위인 인민반에까지 보위부원을 상주시킨다. 이렇듯 철저한 주민정보망을 기반으로 보위부는 체제유지와 정권 위협요소를 색출 및 제거하는 반탐 활동을 앞장서 수행하고 있다.

> 관련 증언

“2014년도에 보위부장이 직장에 찾아와서 욕을 했어요. ‘아들이 지금 어디 가 있는가’ 그래서 어머니가 짐작하고 있는데 비슷하게 내용을 말하고 갔으니까. 와서 ‘자식을 이렇게 키우느냐.’고 별의별 말을 했다고 했어요. 그 뒤로 담당 보위원이 감시 격으로 붙은 것 같았어요.(...) 어머니를 감시는 대놓고는 한다고 못하는데 자꾸 보위원이 계속 온다고 했어요. 2일에 한 번 씩 거의 오는 것 같다고 했어요. 한 달 후에는 뜸해졌다고 했어요” (프라이버시권, E16-I-1150, 윤00, 남, 평안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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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튼’의 삶, 그것이 궁금하다

2016년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북한의 부유층들의 일상을 소개하면서 ‘평해튼(Pyonghattan)’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한 바 있다. 이는 평양과 맨해튼을 합성한 말로, 평양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평양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배급에서부터 인프라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는 지역이다. 북한 당국은 1997년부터 평양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특별히 ‘시민증’을 발급하였는데, 관련 법령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시 관리법’) 평양에서 사는 것이 큰 특권임을 공표하고 있다, “평양시민은 국가의 정책관철에서 모범이 되어 수도시민으로서의 영예를 지키며 평양시민이 국가의 법질서를 엄중하게 어긴 경우에는 평양시민증을 회수한다”는 것은 평양시민을 언제든지 지역으로 추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평양과 지방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평양 시민들은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다, 다른 지역주민들과 달리 평양시민증이 있다면 북한 내에서는 통행증 없이도 국경지역(신의주, 나진 선봉, 혜산, 무산, 회령, 온선 등)과 개성을 빼놓고는 어디든 다 이동이 가능하다. 이를 활용해 전국적으로 물품을 유통하여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평양시민이 누리는 특권이다, 전력난이 극심했던 90년대에도 평양은 전력이 끊기지 않았고, 1990년대 100만 명 이상이 아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난의 행군’ 때에도 평양의 배급은 끊기지 않았다니, 북한을 ‘평양 공화국’이라 일컬어도 무색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다.


- 북한 돈보다 더 신뢰받는 ‘달러’?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과 북한 경제’

북한의 화폐 단위는 우리나라와 같이 ‘원’이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원’보다는 ‘달러’ 또는 ‘위안’을 더 신뢰하고 선호한다. 북한화폐가 시장에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 북한이탈주민 설문조사에 따르면 북한 주민의 보유 현금 중 중국과 접경 지역은 위안화가 78%, 달러화가 5%이며, 기타 지역은 달러화가 50%, 위안화가 22%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북한 돈으로는 살 수 있는 것에 제한이 있지만 달러로는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게 북한의 현실이라는 것. 북한의 원회가 이렇게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2009년 화폐개혁으로, 이때 북한은 일주일 가량의 시간을 교환 기간으로 두고 기존의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토록 했다. 교환기간에 바꾸지 못한 화폐는 일체 무효, 즉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는 강경 조치 아래 북한 주민들은 ‘북한 화폐’에 대한 신뢰를 단기간에 아주 강하게 잃게 된 것. 이런 이유로 북한 주민들은 원하는 물건을 거래할 때 ‘달러’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금액대를 계산할 때에도 달러 단위로 사고한다.

> 관련 영상 : 北 주민 은행 불신..두 개의 화폐 시스템? [모란봉 클럼] 251회 2020.08.16

추가정보

- 727 차량? 그게 뭔데?

727 차량은 북한에서 ‘727’로 시작하는 번호판을 단 자동차를 말한다. 727은 북한이 '전승절'로 기념하는 정전협정 체결일(1953년 7월 27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김정은 당 총비서가 고위급 간부에게 내려 준 차량번호판의 고유 번호다. 주로 노동당 중앙위원후보 이상 직급에게 부여된 것으로 알려진다. 2017년 북한의 핵, 탄도미사일 도발로 인하여 국제사회의 경제재제가 강화되자 북한에서는 휘발유 가격이 세 배 이상 급등한 바 있는데, 이 시기 북한은 727 번호판을 단 차량을 제외하고는 주유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727 차량’은 10호 초소의 검문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즉 ‘727 차량’은 당 혹은 군의 고위간부임을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관련 동영상: 북한 고위급 차량 번호 ‘727’ 의미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218941)


- 북한의 택시 들여다보기

평양에서 택시를 이용한 방문객들에 따르면 평양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데 평양 택시의 기본요금은 2달러라고 한다. 평양역에서 가까운 고려호텔이나 창광산호텔까지는 기본요금이면 갈 수 있고, 조금 먼 청련 호텔이나 양각도 호텔은 4달러 정도를 지불해야한다고 한다. 2013년 당시까지만 해도 평양 시내 택시는 400여 대가 운행 중이었다. 하지만 최근인 2019년 전문가의 언급에 따르면 6개에서 7개의 사업소 단위로 총 8천대에서 만대의 택시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약 6년 사이 엄청난 증가 추세를 기록했다. 차량의 증가에 따라 평양 중심가는 출퇴근 시간 교통체증이 심해졌다. 북한 거리의 상징 중 하나였던 여자 안내원이 사라지고 신호등 시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 내부의 택시 이용도는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수입이 좋은 만큼 택시기사가 되는 것을 꿈꾸는 북한 남성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추가정보

- 앞지대 (남한과 맞닿아 있는 전선 지역을 일컫는 북한 말)

2013년과 2014년에 수영을 해서 귀순해온 북한이탈주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교동도와 서부전선 전역에는 헤엄쳐 건너오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있다.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군의 최단거리는 약 2.6km로 매우 짧다. 고로 교동도에서 육안으로 북한 마을이 보이며, 전망대를 통해 망원경을 이용해서 보면 농사짓는 농민들과 군인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서해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유속이 빨라 익사할 위험이 있지만 목숨을 걸고 몸을 던지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다수 있다. 그만큼 가깝기 때문에 교동도는 검문을 통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 추가 영상 : “북에서 왔습니다.” 민가 ‘노크 귀순’ 인천 교동도의 수상한 침입자

NS

선택1

함흥역으로 떠나려는 순간 우리 지역을 관리하는 인민반장이 가족들과 급히 어디를 가냐며 캐묻기 시작했다. 인민반장을 피해 함흥역으로 무사히 가야 한다. 인민반장은 의심을 품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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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2

인민반장은 각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알고 있다는 말이 있던가. 우리집은 마침 그 맘때 조부모님 제사가 있었고, 인민반장은 그를 기억했다. 제사 음식 할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느냐는 말을 건네며 우리집 사정을 걱정하는 그와 말 몇 마디를 나누고, 얼른 함흥역으로 이동했다. 잠깐 간담이 서늘했지만 무사히 잘 넘긴 듯하다.

함흥 역에 도착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던 열차는 다행히 시급한 우리를 기다렸는지 때마침 역에 정차해있었다. 목적지는 무산. 열차에 타기 위해 난리치는 사람들 속에서 혼란한 틈을 타 함흥역 열차에 탑승 검열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올라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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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3

얼마 없는 돈이지만 승무원에게 중국 위안화 몇 장을 넘겼다. 그는 우리 가족을 스윽 살펴보더니 올라타라는 손짓을 했다. 함흥에서 무산까지는 한참이지만 일단 첫 단추를 잘 꿰었다. 기차를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에 몸을 구겨 넣었다. 몸이 편하고 불편하고를 따질 수도 없었다. 창문 밖으로 고향 함흥의 풍경이 멀어지고 있었다.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친 대가가 이것인가. 군 생활을 한 시간들에 허무함이 몰려왔지만, 정신을 다 잡았다. 무엇보다 이 땅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이제 열차 내 통행증 검열을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꺼내어 세어봤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통행증이 없는 우리는 검열에 걸리면 승무원들에게 고이는 방법이 유일하게 통과할 수 있는 길이다. 승무원이 통행증을 요구한다. 통행증이 없다며 벌금으로 100원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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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4

돈을 넣어둔 주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둘러대면서, 다음 역에 도착하기 전에 벌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승무원이 당장 내리라고 소리를 쳤다. 그에게 이따 돈을 주지 못하면 역에서 내리면 되지 않겠냐고 맞받아쳤다. 역에 도착하기 전에 벌금을 찾지 않으면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혼쭐을 내주겠다는 말에 심장이 움츠러들었지만, 당당하게 맞섰다. 역에 가까워져 오자 승무원이 다시 다가왔고, 그에게 준비해둔 돈을 건네주었다. 가족들은 무사히 기차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기차는 국경지역을 향해 계속 나아갔고, 무사히 다음 역에 정차했다. 새로운 승무원들이 탑승했다. 또 다시 위기이다. 통행증을 요구한다. 또 다시 100원을 요구한다. 국경을 무사히 넘기 위해서 필요한 금액을 계산해보니 남은 돈이 많지 않았다.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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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5

승무원은 다음 열차로 이동했다. 강을 넘어갈 때 쓸 돈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국경에 한 발 더 가까워지는 게 중요했다. 불안함을 껴안고 가족들은 기차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가까스로 무산에 도착했다. 이제 무산에 사는 친구를 무사히 찾아 브로커를 소개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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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6

가져온 돈을 모두 다 쓰게 되겠지만 써비차를 탔다. 일단 지금을 무사히 통과해야 강을 넘고, 중국으로 가는 수를 마련할 게 아닌가. 써비차를 타고 군대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친구의 집으로 도착했다. 그가 무산에 산다고 하였을 때 이렇게 그를 보러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차는 금세 친구의 집에 닿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사정을 묻지도 않고 그는 우리 가족을 받아주었고, 돈이 필요하면 부족한 금액을 보태주겠다고 했다. 브로커 소개도 받았다.

이제 도강 계획을 세우고 일시를 정해야했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브로커가 국경경비대와는 거래를 끝냈지만 경비 수준이 강한 10호 초소는 피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하지만 10호 초소와 멀리 있는 곳은 강물이 깊고 물살이 강해 위험하고, 물이 깊지 않은 곳은 10호 초소와 가까워 걸릴 위험이 있다.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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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7

물살이 거세 몸이 요동쳤지만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강하게 붙잡고 무사히 도강에 성공했다. 젖은 생쥐 꼴이 됐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브로커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이동했다, 일사천리로 그를 만나서 그의 차를 타고 브로커의 은신처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웠지만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아버지를 구하러 가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한다. 은신처에 있는 동안 돈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일자리라도 찾아봐야할지, 안전하게 계속 숨어있어야 할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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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배고픔을 참으며 은신처에 몸을 숨긴 결과, 한국행을 함께할 8명 정원이 모두 모였다. 비용을 걱정하니, 운전을 하는 사내가 한국의 한 단체가 모든 탈북자들의 비용을 대주기로 하였다고 말을 전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고, 드디어 살았구나 하며 마음이 놓였다. 이제 출발이다.

실패

인민반장을 때린 것을 실수였다, 그가 정신을 잃은 것 같아 재빨리 함흥역으로 도망쳤지만, 금세 정신을 차린 인민반장이 보위부원들을 이끌고 뒤를 쫓았다. 가족들은 얼마 가지 못한 채 그들에게 잡혔다, 아버지 사건 때문에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도 금방 들통이 났고, 우리 가족들은 다같이 보위부로 끌려가게 됐다. 다음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구류되었고, 얼굴 위로 주먹질이 쏟아졌다. 탈출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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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반 그리고 인민반장 :

>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최말단 행정 통제조직으로 ‘인민반’을 두고 있다. 북한은 인민반을 ‘주민들이 사는 모든 지역에서 가까이 있는 일정한 수의 세대들을 망라하고 리(읍, 로동지구, 동) 및에 조직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은 다 인민반으로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북한 모든 주민들은 주거별로 인민반 생활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집단주의 가치를 철저히 실현하고 있다. 인민반을 통해 주민들은 상호 간의 친밀감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는 이중적인 관계가 된다. 일반적으로 30~40개의 인민반이 최말단 행정조직인 1개의 동을 구성하며, 동과 인민반은 지방(시, 군, 구역)인민위원회의 산하 조직으로 당 정책을 관철한다. 다시 말해서 북한의 인민반은 국가 사회 내에서 형성된 관료제적 조직체계가 주민생활에 침투해, 위로부터의 관리가 이뤄지도록 하는 ‘사회적 관계망’이라 할 수 있다.
인민반의 구성을 보면, 인민반장과 세대주(남편들) 반장, 위생반장, 선동원, 안전소조원(비밀정보원) 그리고 인민반원들(인민반 구성원들)로 이뤄져 있다. 인민반장은 우리의 ‘통장’과 비슷하며, 주민이동과 전출, 위생, 문화, 노력동원, 사상교양, 환경정리, 공공주택관리 등 인민반의 사업과 정책을 집행하고 통제하는 총 책임자이자 주민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감시하는 공개된 ‘스파이’이다. 븍한은 인민반장의 위치와 역할을 “인민반장이 우리 당 정책을 잘 알고 그 관철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며 매 가정의 형편을 구체적인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꿰뚫고 반원들의 생활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민반장은 주로 직장에 나가지 않는 가두여성(전업주부)이 맡으며, 인민반을 잘 이끌기 위하여 일정 수준의 지식과 통솔력을 갖춰야 하고 출신성분이 좋은 여성 당원이거나 간부의 부인이 맡기도 한다.
(배영애, 2018,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인민반’의 역할과 변화」, 『통일과 평화』 10집 2호)

실패

창문으로 올라가는데 승무원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결국 가족들은 열차 탑승에 실패했다.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려 했지만 방도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 눈에 너무 띈 나머지, 우리 가족을 사람들이 수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신고를 했는지 보위부원들이 이내 달려왔다. 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이었다는 것은 금방 밝혀졌고,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보위부로 끌려갔다.

실패

승무원이 돈을 받더니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무사히 다음 역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있는데 돈을 받아간 승무원이 가족들을 모두 내리라고 지시했다. 아까 벌금을 내지 않았느냐고 항변했지만, 승무원이 더 소란을 피우면 사람을 부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열차에서 내렸고 우리는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탈출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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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기본권 행사 위에 뇌물 바치는 사회“

북한에서는 뇌물을 준다고 할 때 “뇌물을 고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노동당 입당, 출세 등을 위하여 당 간부나 상사에게 뇌물을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출세뿐만 아니라 생활의 전 방위에서 뇌물 문제가 만연하다. "뇌물이 고이면 움직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 데일리NK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 함경남도 ‘함흥산원(산부인과)’에서 ‘뇌물’을 고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함흥산원에서는 입원 수속뿐만 아니라 진료를 위한 뒷돈, 담배와 술, 심지어 점심이나 저녁 중 한끼를 보장하는 등의 뇌물을 산모와 가족들에게 암암리에 요구해왔는데, 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되어 산모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망한 것이다. “뇌물이 고이면 움직인다”는 말로 이를 이해하자면 “뇌물이 고이지 않아 움직이지 않은” 상황인 것. 이렇듯 뇌물을 바치고 또 그를 자연스럽게 받는 문화는 북한 곳곳에 공기처럼 퍼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권리의 대가’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통해 “왜 북한 주민들은 지구촌 주민들이 일상에서 누리는 기본권 행사를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실패

승무원이 장난치는 거냐고 소리를 차면서 당장 내리라고 우리 가족을 몰아세웠다. 내려도 다음 역에 내려야 하지 않겠냐고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주먹질 뿐이었다. 한참을 맞았을까. 어딘지도 모르는 역에 도착했고 우리 가족들은 밀쳐지듯 기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역을 빠져나와 몸을 숨기려고 했지만, 누군가 낯선 얼굴인 우리를 신고하였는지 보위부원들이 뒤를 덮쳤다, 통행증을 달라는 말에 아무말도 못하니, 바로 보위부로 끌려가게 됐다. 탈출은 그렇게 실패했다.

실패

역을 빠져나와 은밀히게 이동하려고 했지만, 누군가 낯선 얼굴인 우리를 신고하였는지 보위부원들이 뒤를 덮쳤다, 통행증을 달라는 말에 아무 말도 못하니, 바로 보위부로 끌려가게 됐다. 국경을 앞에 두고 탈출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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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와 ‘프라이버시권 침해’

> 보위부는 ‘국가안전보위부’를 말한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 보위규율기관 중 하나로, 우리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하지만 보위부는 북한 특유의 체제보위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차이다. 주로 간첩 및 반혁명분자 색출, 주민들의 사상 동향 감시, 대남 정보업무 등을 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당, 정, 군 그리고 기업소(주민들의 근무지)까지 파견되고 있고, 최말단 지방조직인 농촌의 리 단위, 주민들을 거주지 별로 묶은 단위인 인민반에까지 보위부원을 상주시킨다. 이렇듯 철저한 주민정보망을 기반으로 보위부는 체제유지와 정권 위협요소를 색출 및 제거하는 반탐 활동을 앞장서 수행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권이란 개인의 사생활이나 집안의 사적인 일, 또는 그것이 남에게나 사회에 알려지고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프라이버시권 침해로는 감시와 도청이 있는데, 사실상 북한 전 인민은 촘촘히 짜여져 있는 보위부의 감시망 아래 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NKDB 통합인권 DB를 기반으로 프라이버시권 침해 정도를 보면 그 수가 330건으로 확인된다. 특히 함경북도에서 152건이 조사되었는데, 이는 조사에 참여한 증언자 중 함경북도 출신의 비율이 높다는 점 더불어 함경북도와 같은 중국 국경근접지역에는 체제에 위해가 되는 ‘국경월경’ ‘밀수’ ‘중국휴대폰 사용’ ‘외부 미디어 유입’ 등의 비법적 행위들이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국가기관에 의한 감시, 도청, 검열 등이 매우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실패

물살이 약해 빠르게 도강을 시도했지만 10호 초소병들에게 발각되었다. 발각되는 것을 대비해 뇌물로 현금을 준비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실패

일자리와 음식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공안이 신분증을 요구한다. 그렇게 나는 공안들에게 체포되었다. 어머니와 동생만 두고 다시 조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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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안으로부터의 강제 북송

> NKDB 통합인권 DB의 ‘이주 및 주거권 침해 사건’ 케이스를 지역별로 확인하였을 때, 이주 및 주거권 침해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된 지역은 ‘중국’(73.3%)이다. 특히 ‘강제송환 사건’은 이주 및 주거권 침해 사건 중 70% 이상을 차지하고, 강제송환의 98%가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강제송환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은 중국에 머물던 북한이탈주민이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되는(강제북송) 사건을 의미한다.


-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북송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랴오닝성 선양 수용소에 1,2년 가량 수감돼 있던 탈북자들을 14일 단둥 국경 세관을 거쳐 북한으로 보냈다. (중략) 북송된 50여 명 중에는 북한군 병사와 공군 파일럿 출신도 있었다. 30대 탈북 여성은 중국인 남성과 결혼해 12세 아들을 뒀고, 중국에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이 여성은 두 번째 북송되는 것이어서 생사를 가늠할 길이 없다. 남편이 아내를 구하기 위해 뇌물을 쓰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관련기사 링크: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10718/108019527/1)


-북송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야?

> NKDB 통합DB 내 증언
“2011년 비법월경으로 강제송환 당한 후, 6개월짜리 단련대로 보내더라고요. 거기는 무슨 돌캐는 일 합니다. 엄청 더웠습니다. 단련대가 얼마나 쌘지 계속 뛰어다녀야 하지, 밤에 11시~12시에 재우고 아침 5시 기상시키고 아침하고 저녁에는 날이 쌀쌀해서 불도 안 떼니 찬 기운 올라오지. 그 때 콩팥이 아프고 영양실조 와서 밥도 못 먹고 발부터 얼굴까지 쭉 부어올랐습니다.” (단련대 구금, E14-I-1131, 박OO, 여, 평안북도)

동영상 : 10번의 북송끝에 탈북에 성공한 누나가 말하는 북송되면 당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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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민군사복무제 : 북한에서는 누가, 언제 군 입대를 할까?.

“북 청년들의 군복무 기피현상 증가” (RFA, 2021-03-10)"
링크: 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je-03102021090521.html

> 정답은 ‘남녀 모두, 중학교 졸업 이후에’. 북한은 2003년 3월 군사복무법을 제정하고 ‘전민군사복무제’(사실상의 징병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남성의 경우 만 14세가 되면 초모대상자(입대 지망자)로 등록해야 하며, 만 15세에 두 차례에 걸쳐 신체검사를 받는다. 이후 중학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병으로 입대한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에, 취업자는 근무한지 3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을 징집 대상으로 한다. 군 복무기간은 남성의 경우 10년, 여성의 경우 7년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는 군대에서 복무한 후에야 노동당 가입이 가능하여 군입대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뒤 북한주민들은 먹고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먹고 사는 것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인식함으로써 과거처럼 입영에 대한 인기가 높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북한은 사실상의 징병제인 전민군사복무제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전민군사복무제’)


- 성분 : 그런데 ‘국군포로 출신’이 왜 문제가 되는거야?

> 추가 동영상 : 북한 엘리트의 기준은 『출신성분?』 | [모란봉 클럽] 258회

> “성분이 좋지 않아서”다. 북한은 사회 구성원들의 계층(성분)을 ‘출신성분’과 ‘사회성분’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있다. 이때 출신성분은 한 개인이 출생한 때에 부모의 성분을, 사회성분은 개인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직업 및 사회계급적 관계에 의해 부여받는 성분을 의미한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사회의 계층구조를 새롭게 구성하였는데, 이 때 ‘전쟁의 피해보상’이 계층구조 구분의 중심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피해자가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전사자, 피살자 가족을 사회의 핵심세력으로 등용시키면서 계층구조를 재정비했다. 이 정책을 통해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체제 유지에 대한 인민의 의지는 고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월남자 및 그 가족에게는 정치적, 사회적 체벌을 주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흐름 하에 북한의 계층은 혁명가 가족, 영예군인, 영웅 공로자, 제대 군인 등을 아우르는 ‘핵심계층’과 일반 노동자와 기술자, 농민 등은 ‘동요 계층’, 과거 지주나 자본가, 월남자 가족과 불순분자 및 반동분자 등으로 낙인찍힌 인물들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었다. 국군포로 출신의 인물들 역시 적대계층에 속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리 잡은 계층은 계층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폐쇄적인 구조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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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철도 상황은?

> 북한 청진에서 신의주까지는 도로로 957km 거리다(구글 맵 기준). 자동차로 꼬박 달리면 1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 화물 온송의 80%, 여객 운송의 60%를 차지하는 교통수단인 기차를 이용하면 어떨까? 북한 철도 당국이 고시한 이 노선 철도 왕복 운행 간격은 이틀이다. 청진에서 평양 간리역을 거쳐 신의주를 찍고 돌아오는 데 40시간이 걸린다는 것. 청진 출발 평양행 열차는 이틀이면 다시 청진으로 돌아와 출발 대기에 들어가야 한다. 북한이 전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던 2012년 당시에는 왕복 운행 시간이 보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청진에서 간리역을 경유하여 신의주로 가기 위해서는 최장 15일을 기다려야 했던 것. 이런 이유로 승객들은 객차 곳곳에 빈틈만 보이면 승객이 진을 쳤고, 단거리 지역 이동 승객들은 열차 지붕까지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에서 열차 지붕 이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2000년대 후반 집중 단속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으로 열차 구조와는 상관이 없다. (함북 청진서 기차로 신의주 다녀오는데 보름 걸려 / 데일리NK, 2012-12-27)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북한의 철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북 철도 공동조사를 위해 10년 만에 북측으로 한국의 기차가 떠났던 2018년, 공동조사를 기회로 북한의 철도 상황을 살펴보니 북한 철도의 97%는 선로가 하나뿐이라 열차들이 순서에 맞춰 한 선로를 이용해야하고, 이 마저도 전기가 끊어져서 운영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한다. 열차 평균속도 40km, 북한의 철도 상황의 개선도 느림보 걸음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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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행증’ 그것이 알고 싶다.

> 북한은 세계에서 통행증 제도를 실시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북한 헌법 제75조는 “공민은 거주, 려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북한의 인민보안법단속법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북한이 2005년 7월 26일 수정 보충한 인민보안단속법 제30조는 “인민보안기관은 려행질서, 걸어다니는 질서를 어기는 행위를 단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반 주민들은 여행 시 반드시 ‘여행증명서’를 소지해야 하는데 이 종류는 크게 4가지다. 평양시 출입여행증, 군사분계연선 여행증, 국강연선 여행증, 일반여행증이다. 이들 여행증은 지방지역의 인민보안부에서 직접 승인하고 발급해주며, 주민들의 계급적 환경과 주민동향, 사회적 위험성 정도를 고려해 ‘정수분자’들만 발급해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특히 북한은 자본주의 자유바람과 탈북민들의 월경을 막는다면서 함경북도 무산, 회령, 온성, 그리고 양강도 혜산 일대의 국경지역과 황해도와 개성 일대의 비무장지역은 승인번호가 있어야만 통행증이 발급된다. 예를 들어 지방의 일반사람이 승인번호구역 여행을 하려면 인민보안부 2부 (증명서 발급과)에서 여행증명서 신청서서류를 받아가지고 취직 기업소 책임자승인도장과 해당 인민반장 도장 그리고 담당 보안원, 담당 보위원 승인도장을 받아 다시 인민보안부의 증명서발급과에 제출한다. 그중 한사람이라도 승인을 허락받지 못하면 무효가 된다. 통행증을 발급받은 대상자 중에 행불자가 있을 경우 승인을 허락한 사람들에 대한 연대적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에 가급적 출신성분이 좋거나 부유한 계층만을 기본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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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통행증이 없으면 어떻게 되지?

> 탈북민의 증언,
“만약 (주민들이) 통행증이 없이 열차에 오르면 어떤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게 됩니까?”
“세계 여러나라들을 보면 통행증 제도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예를 들어 유럽국가의 경우 (손님이) 차표가 없다고 하면 차장이 와서 끊어만 주면 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증명서와 통행증이 없다고 하면 보안원들이 사람들을 완전히 (짐승처럼) 끌고 다니면서 본인을 정말 피곤하게 만들고, 심지어 여자들의 몸에 손을 대면서 부질없는 행동까지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요. 보안원들은 주민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면 강제로 하차시키기도 합니다.


> ‘도로사정도 비슷’

북한 당국은 전국 각지 도로에 간첩적발을 위한 보위부 10호 초소를 배치해 놓고, 여행증명서 없는 보행자나 상인들을 단속해 해당 보안서 노동단련대에 보내어 몇 달 동안 강제노동을 시키고 귀가시킨다. 도내에서는 여행증명서 없이(승인번호구역제외)공민증(주민등록증)만 가지고 여행할 수 있지만 농번기인 5월과 6월과 추수시기 10월은 주민유동과 상적행위를 거의 제한하는 정책으로 단속된 사람에 대해서는 현지 주변 농장에서 하루 종일 무보수 노동을 강요하며 일정한 량의 벌금도 물린다. 장사를 목적으로 여행하는 상인들은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으므로 단속될 때마다 뇌물을 뿌려가며 단속을 피한다. ‘돈주’ 상인들은 국경지역과 인접한 곳에서 상품을 무더기로 도매하기 위해 국가감독기관 사람이나 보안원 내지는 보위원에게 돈과 뇌물을 주어 일정한 곳까지 상품의 호송을 맡기기도 한다.
(관련기사 링크: http://m.unityinfo.co.kr/a.html?uid=1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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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비차(service-car)’는 뭐지?

> 영상 : 열차 대신 ‘써비차’ 타요

> 써비차는 2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각급 기관, 기업소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차량으로 주민들의 사적 이동이나 물류수송 등을 대신해주는 돈벌이에 나서는 버스, 화물차다. 기업소는 이렇게 번 돈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식량배급이나 운임, 생산원료 확보에 활용한다.
다음으로 실제 개인 소유 차량을 기업소 차량인 것처럼 등록하고 개인 영리활동을 벌이는 식이다. 이 경우 차량 소유주, 운전수, 문건 상 차량 소유기관 등 3자 협조가 필요하다. 소유주는 중국, 일본 등에서 중고차를 수입해 특정 기업소나 단위의 간부들과 짜고 기업소 소유 차량으로 등록한다. 이후 운전수를 별도로 고용하고, 기업소 간부에게는 차량 운행증을 발급받아 일반주민들을 태워주거나 물건을 운반해 돈벌이에 나서는 것. 이렇게 낸 수익은 기업소 간부에게 바치고, 기업소 간부는 일부를 착복한 후에 일부만 기업소의 이익금으로 장부에 기록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메커니즘 아래 2000년대 중반 이후 북한내부에서는 노동자 100명도 안 되는 ‘생필품 공장’ 조차 써비차를 갖게 됐다. 써비차의 운행으로 도(道)와 도 사이의 물동량과 인적 이동이 크게 늘어나, 두만강-압록강에서 밀수입된 물품이 황해도, 강원도 까지 전해졌다. 기업소의 생산과 거래가 증가하고 개인 장사가 번창하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써비차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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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명 높은 10호 초호

> 영상: 이것이 북한 비밀경찰의 ‘10호 초소’다.

> 10호 초소는 시와 도의 경계마다 설치된 보위부 산하 검문소로, 북한 주민의 이동을 가장 심하게 통제하는 곳이다. 초소를 통과하는 모든 차량과 사람은 통행증이 있어야 하고, 사람이 많이 타는 ‘써비차’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모두 내려서 한 사람씩 검열을 받아야 한다.
북한은 이동의 자유가 없어 다른 도나 시, 평양 등을 가려면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이를 검사하는 곳이 10호 초소다. 즉, 10호 초소는 사람의 이동 자체를 통제하는 ‘정치 검문소’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이지만, 북한은 ‘뇌물이 고이면 움직이는 사회’다. 그런데 10호 초소는 여러 규제와 통제 아래 뇌물 자체가 잘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통제장치다. 2018년의 아시아프레스 보도에 따르면 10호 초소에서 알몸수색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고 알려진다. 여성이라도 속옷 안까지 체크하여, 중국에서 들여온 usb나 메모리카드, 휴대전화 등을 집중 단속한다고 한다.
(출처: 이것이 북한 보위부의 ‘10호 초소’, RFA 2015-06-18 / 여자들 속옷까지 벗겨 몸수색“ 北 주민통제 강화, 뉴데일리 201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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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은 한국행


> “중국과 라오스 공안에 붙잡히면 죽고, 태국 경찰에 붙잡히면 산다”

태국 북부 치앙라이(Chiang Rai)주는 최대 탈북 루트로 통한다. 탈북자 상당수가 메콩강을 건너 태국 땅을 밟은 후 한국에 들어온다. (중략) 치앙라이주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북·중 국경에서 장장 1만여km 떨어져 있다. 북한에서 치앙라이까진 기차와 버스, 승용차, 배 등 항공기를 뺀 대부분의 교통수단이 이용된다. 그야말로 대장정이다. 중간중간 안전가옥이나 은신처에 머물기도 한다. 중국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할 땐 밀림의 가시덤불을 걸어서 통과해야 한다. 험난한 산악지대를 오르내려야 한다. 중국과 라오스의 공안(公安) 단속과 검문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관문인 메콩강을 건너야 한다.
그들은 칠흑같은 심야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탈북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메콩강에 띄워진 작은 배에 몸을 싣는다. 라오스와 태국 사이 메콩강 폭이 좁은 곳은 200여m. 그 짧은 거리가 생사의 마지막 고비일 수 있다. 무사히 건너면 탈북 루트의 9부 능선을 넘는 셈이다. “탈북자들은 북한 땅을 떠나 빠르면 보름, 더디면 2~3개월 만에 태국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태국 현지 교민과 주민들은 전했다. 그것도 ‘운 좋은’ 경우에 한해서다. 중국이나 라오스 공안에 체포되면 북송(北送)된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탈북자들은 “중국과 라오스 공안에 붙잡히면 죽고, 태국 경찰에 붙잡히면 산다”고 말한다. 태국은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원하는 국가로 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메콩강을 건넌 탈북자들은 자진해 태국 경찰서 문을 두드린다. 치앙샌, 치앙콩(Chiang Khong), 농카이(Nong Khai) 등 메콩강변 국경도시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수도 방콕에 있는 수용소로 넘겨진다.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거기서 한동안 대기하다 한국에 들어와 국정원 등의 조사를 받는다. 이후 경기도 안성에 있는 통일부 산하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정식명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 입소한다. ‘탈북 대장정’이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최대 탈북 루트 ‘골든트라이앵글’을 가다“ 시사저널 2019-07-03)
(링크: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87700)

NS

선택1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하염없이 올라간다. 장사꾼들이 단속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산 경로를 알려주어 산 능선을 탄 것이 벌써 며칠 째. 집에서 가지고 나온 감자 몇 알이 떨어진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너무 배가 고프고 추웠다. 앞이 깜깜했다. 산 밑에 마을이 보인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순 없으니 일단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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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2

산을 내려가니 다행히도 인적이 드문 마을이 있었다. 얼른 사람이 없어 보이는 집에 들어가 눈에 보이는 물과 음식들을 주워 빠르게 먹었다. 잠시 숨을 돌리니 움직일 힘이 돌았다. 다시 산에 올라,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한 5일은 지났을까. 너무 배고프고 무섭다. 어딘지조차 모르고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물이 나려던 차에 산 아래 열차가 정차해 있다. 내려가서 열차에 올라타야 할까. 아니면 가던 길을 계속 걷는 것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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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3

잡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계속 산을 따라 이동했다. 산을 타고 며칠을 개울물과 풀, 나무로 연명하며 살겠다는 생각만으로 버텼다. 마을과 강이 보인다. 조심스레 내려가 이정표를 보니 김정숙군이라고 적혀있다. 국경이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 강 하나만 넘으면 조선을 벗어날 수 있다. 두만강 너머의 중국 땅을 한참 바라보았다. 저 강만 넘으면 가족들이 한국으로 갈 때 도움을 받았던 조선족 지인의 집으로 갈 수 있고,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함흥에 사는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 기적이나 다름없는데, 저 강을 넘을 수 있을까. 강을 넘기까지 과정이 까마득하기만 한데.. 해가 지기 시작한 저녁 어스름, 이제 밤이 지나기 전 결심을 해야 한다. 홀로 도강할까? 아니면 이곳 주민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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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땅을 파고 들어가 추위를 견디다가 늦은 밤에 질주하여 도강을 시도한다. 이제 국경이 눈앞인데 심장이 떨린다. 어떻게 해야 될까. 일단 오늘 밤을 버티기 위해 돌로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파고 지푸라기로 위를 가렸더니 추위를 버틸만하다. 동이 틀 무렵, 불안감에 더 이상 버틸 용기가 없었던 나는 해가 뜨기 전에 저 강을 건너지 못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강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굴을 팠던 돌로 철조망 아래 부분을 미친 듯이 파내려갔고 내 몸을 집어넣어 통과시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얼어붙은 강을 뛰어 건넜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강 건너편이었다. 나는 몸을 숨겼다. 누가 있었는지 누가 나를 봤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도강에 성공했다. 공안들에게 들키기 전에 조선족 지인의 집에 도착하여 숨었고, 곧바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가족들이 한국으로 넘겨줄 방편을 빨리 찾아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실패

산 밑에 내려갔더니 마침 아주머니 한 분이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북한을 떠난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날 도와주지 않을까. 아주머니를 붙잡고 도움을 요청했다. 아주머니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어디 출신이냐며 의심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함흥 출신인 것을 실토하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나를 보위부에 신고했고 나는 체포되었다.

추가정보

- ‘다른 지역 출신이라서 체포됐다?’, 이동의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는 북한 사회.

> 관련 동영상 : 《사랑의 불시착》, 여행증제도 & 여행증 없이 여행하다 걸리면?

> “북한은 1948년 공산정권 수립 직후부터 군(郡)의 경계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려면 거주지 인민위원장이 발급하는 여행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북한은 도시의 인구가 적고 인구의 이동을 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는데 이는 시민사회 형성을 억제하고 인민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하여 독재적인 통치를 용이하게 한다”(남성욱·황주희, 2018, 「북한 행정구역 개편의 함의와 행정통합에 관한 연구」, 『통일정책연구』, 27권 1호)

> 북한은 인민보안단속법과 행정처벌법에 의해 주민의 이동을 제한할 수 있다. 인민보안단속법 제30조에 따르면 인민보안기관은 여행질서, 걸어다니는 질서 위반행위를 단속할 수 있다.또한 동 법 제57조는 인민보안기관이 위반자에게 직접 벌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주고 있다. 행정처벌법 제185조는 국경출입 및 반출입 질서 위반자에게 경고, 엄중경고, 몰수 또는 3개월 이하 무보수 노동, 노동교양 등의 형을 처벌할 수 있다. 동 법 제194조는 여행질서 위반행위와 불법적인 통제지역 출입행위에 대해 경고, 엄중경고, 벌금, 3개월 이하의 무보수노동, 노동교양형을 부과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위반행위의 정상이 무거운 경우 3개월 이상의 무보수노동, 노동교양, 강직, 해임, 철직 처벌을 내릴 수 있다.

실패

열차를 타기 위해 내려왔다. 열차 안에 타면 검열에 걸릴까 염려되어 열차가 출발할 때 가까스로 기어올라 열차의 지붕 위에 올라탔다. 열차가 달려간다. 너무 춥다. 앞은 안개처럼 뿌옇다.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 눈 바로 앞에 터널 천장 부분이 나타났다. 그동안 살아온 많은 장면들이 그 짧은 순간에 영화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터널과 부딪쳐 나는 나가 떨어졌고 다리 아래 얼어있는 강 얼음 위로 곤두박질쳤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죽는 것일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추가정보

- 탈북하다가 사망하는 거, 실제 상황 맞아요?

열차의 지붕 위를 매달려 이동하다가 사망한 직전의 시뮬레이션은 북한이탈주민과의 인터뷰 중 들었던 실제 이야기이다. 탈북 중 발생한 사망사건의 수를 헤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헤아릴 수 없는 안갯속 상황을 짚어볼 수 있게 해주는 언론 보도가 있다.
> 보위원 성폭행 참지 못하고 탈북 시도하던 여성, 총 맞아 숨져 (데일리NK, 2020-08-18)

실패

도움을 요청하여 국경을 넘는다. 강 주변 풀숲에 몸을 숨기고 주민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한참 보는데, 한 아주머니가 은밀히 사람들을 만나고 몸을 재게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이다 싶어 도움을 요청했더니 아주머니께서 나를 숨겨주셨다. 사정을 설명하니 아주머니께서 브로커와 친하다며, 도강 비용은 중국에서 일을 해서 갚을 수도 있으니 걱정말라고 나를 다독였다, 그의 친척인 척 하면서 그 집에 몸을 숨겼다가 새벽에 브로커를 만나 도강을 하고 차에 올랐다. 조선을 벗어났다는 홀가분한 느낌을 느끼기도 전, 갑자기 태도가 우악스럽게 변한 브로커에게 나를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먹질 몇 번을 하며 조용히 하라고 나를 겁박했고, 이내 알 수 없는 시골 동네에 나를 팔아넘겼다. 여기가 어딘지, 또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추가정보

- 탈북과정에서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DB기준 정보

> 북한인권정보센터의 통합인권 DB 자료를 보면, 강제매춘 및 인신매매 사건 수는 1990년대 1,138건으로 조사되었다가 2000년대 2,123건으로 급증하였다. 특히 인신매매와 강제매춘 사건의 97%가 중국에서 이뤄지는 것은, 북한이탈 과정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취약한 상태를 악용하는 경우가 빈번함을 보여준다.

- 인신매매는 중국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관련 기사 링크: "北 양강도 김정숙군에서 인신매매범 4명 공개재판" (http://www.s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47)

추가정보

- 보위부는 어떤 기관인가요?

>보위부는 ‘국가보위성(국가안전보위부)’을 말한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 보위규율기관 중 하나로, 우리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하지만 보위부는 북한 특유의 체제보위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차이다. 주로 간첩 및 반혁명분자 색출, 주민들의 사상 동향 감시, 대남 정보업무 등을 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당, 정, 군 그리고 기업소(주민들의 근무지)까지 파견되고 있고, 최말단 지방조직인 농촌의 리 단위, 주민들을 거주지 별로 묶은 단위인 인민반에까지 보위부원을 상주시킨다. 이렇듯 철저한 주민정보망을 기반으로 보위부는 체제유지와 정권 위협요소를 색출 및 제거하는 반탐 활동을 앞장서 수행하고 있다.


- 보위부와 ‘프라이버시권 침해’

> 프라이버시권이란 개인의 사생활이나 집안의 사적인 일, 또는 그것이 남에게나 사회에 알려지고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프라이버시권 침해로는 감시와 도청이 있는데, 사실상 북한 전 인민은 촘촘히 짜여져 있는 보위부의 감시망 아래 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NKDB 통합인권 DB를 기반으로 프라이버시권 침해 정도를 보면 그 수가 330건으로 확인된다. 특히 함경북도에서 152건이 조사되었는데, 이는 조사에 참여한 증언자 중 함경북도 출신의 비율이 높다는 점 더불어 함경북도와 같은 중국 국경근접지역에는 체제에 위해가 되는 ‘국경월경’ ‘밀수’ ‘중국휴대폰 사용’ ‘외부 미디어 유입’ 등의 비법적 행위들이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국가기관에 의한 감시, 도청, 검열 등이 매우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으로 설명 할 수 있다.

> 관련 증언 “2014년도에 보위부장이 직장에 찾아와서 욕을 했어요. ‘아들이 지금 어디 가 있는가’ 그래서 어머니가 짐작하고 있는데 비슷하게 내용을 말하고 갔으니까. 와서 ‘자식을 이렇게 키우느냐.’고 별의별 말을 했다고 했어요. 그 뒤로 담당 보위원이 감시 격으로 붙은 것 같았어요.(...) 어머니를 감시는 대놓고는 한다고 못하는데 자꾸 보위원이 계속 온다고 했어요. 2일에 한 번 씩 거의 오는 것 같다고 했어요. 한 달 후에는 뜸해졌다고 했어요” (프라이버시권, E16-I-1150, 윤00, 남, 평안북도).


-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제정으로 더 엄격해진 단속과 검열

(관련 기사 링크 : https://www.dailynk.com/%eb%b6%81%ed%95%9c-%eb%8b%b9%ea%b5%ad-%ec%8b%a0%ec%9d%98%ec%a3%bc%ec%84%9c-%ec%99%b8%eb%b6%80%ec%a0%95%eb%b3%b4-%eb%8b%b4%ea%b8%b4-%ec%9d%b8%ec%87%84%eb%ac%bc-%ed%8c%90%eb%a7%a4%ec%97%90-%ea%b2%80/)

> 북한은 2020년 12월 4일에 진행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14기 12차 전원회의에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새로 제정했다. “한국을 비롯한 자유세계(미국, 일본 등)의 문화 콘텐츠를 이용하거나 배포 보관한 자는 (무기) 노동교화형에서 사형 등 최고형에 처한다”는 게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의 골자다. 데일리NK에 따르면 실제 북한에서는 2021년 초부터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근거로 하여 인민들을 강하게 단속, 처벌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청년들과 청소년들에 대한 단속을 가차 없이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2월에는 신의주에서 10대 남학생이 집에서 음란물을 보다가 적발돼 부모와 함께 농촌지역으로 추방되었고, 7월 경에는 양강도 혜산시에서 20대 남성이 길거리에서 한국말을 흉내내다가 시 안전부에 구류되는 등의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추가정보

- 김정숙군은 어디야?

>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은 최고지도자인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도 활용되었다. 행정구역의 이름을 변경하여 인민들의 생활 속에 지도자를 향한 충성심이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1년 양강도 신파군을 ‘김정숙군’으로, 1988년 후창군을 ‘김형직군’으로, 1990년에 풍산군을 ‘김형권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이들은 각각 김정일의 친모, 김일성의 아버지, 김일성의 친삼촌 등으로 김씨 일가원이다. (남성욱·황주희, 2018, 「북한 행정구역 개편의 함의와 행정통합에 관한 연구」, 『통일정책연구』, 27권 1호)
이 연장선에서 각 지역에는 김정숙의 이름을 딴 학교 및 교육 활동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양강도에는 ‘김정숙남고등중학교·김정숙여고등중학교’ 및 ‘김정숙사범대학’이, 평양에는 ‘김정숙 탁아소’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각 학교에는 ‘김정숙 혁명역사’과목을 개설하여 청소년 및 청년들에게 김정숙 우상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 사진 첨부 : “김정숙 동상 경비대, 일반주민 집단 폭행... 현재 의식불명 상태” (데일리NK, 2018-08-27) (사진 활용하면서 기사 내용 일부 활용 가능- 동상 존재와 경비대 관련 내용)


- 북한의 철도 상황은?

> 북한 청진에서 신의주까지는 도로로 957km 거리다(구글 맵 기준). 자동차로 꼬박 달리면 1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북한 화물 온송의 80%, 여객 운송의 60%를 차지하는 교통수단인 기차를 이용하면 어떨까? 북한 철도 당국이 고시한 이 노선 철도 왕복 운행 간격은 이틀이다. 청진에서 평양 간리역을 거쳐 신의주를 찍고 돌아오는 데 40시간이 걸린다는 것. 청진 출발 평양행 열차는 이틀이면 다시 청진으로 돌아와 출발 대기에 들어가야 한다. 북한이 전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던 2012년 당시에는 왕복 운행 시간이 보름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청진에서 간리역을 경유하여 신의주로 가기 위해서는 최장 15일을 기다려야 했던 것. 이런 이유로 승객들은 객차 곳곳에 빈틈만 보이면 승객이 진을 쳤고, 단거리 지역 이동 승객들은 열차 지붕까지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에서 열차 지붕 이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2000년대 후반 집중 단속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으로 열차 구조와는 상관이 없다. (함북 청진서 기차로 신의주 다녀오는데 보름 걸려 / 데일리NK, 2012-12-27)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북한의 철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북 철도 공동조사를 위해 10년 만에 북측으로 한국의 기차가 떠났던 2018년, 공동조사를 기회로 북한의 철도 상황을 살펴보니 북한 철도의 97%는 선로가 하나뿐이라 열차들이 순서에 맞춰 한 선로를 이용해야하고, 이 마저도 전기가 끊어져서 운영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한다. 열차 평균속도 40km, 북한의 철도 상황의 개선도 느림보 걸음을 이어오고 있다.

추가정보

- 두 얼굴의 브로커 : 탈북 브로커는 ‘좋다’ ‘나쁘다’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브로커의 두 얼굴을 각각 보여주는 기사를 소개한다.

> '어머니 모셔올게' 탈북민 상대 사기…브로커 벌금형 (연합뉴스, 2020-11-12)
링크: https://www.yna.co.kr/view/AKR20201112059600065

> 탈북자 500명 구한 '중국인 쉰들러', 한국서 난민 인정 (조선일보, 2018-12-24)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24/2018122400203.html


- 국경경비대, 그들이 알고 싶다

> 관련동영상 링크 : "걸리면 바로 총살이다!" 탈북민을 잡는 북한 국경경비대의 '참혹한 이야기'


- 강을 건넌다는 것

> 사진 : ‘도강하는 북한 주민

> [학술자료] 도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어떤 법을 근거로 하는가?

“북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탈북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북한 형법 221조 비법국경출입죄이다. 이 법은 비법적으로 국경을 출입한 자를 1년 이하의 로동단련형에 처하며, 그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처벌규정의 이원화는 단순생계를 위한 탈북과 체제이탈로의 탈북을 구분하여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비법국경출입죄와 조국반역죄 규정 이외에도 북한 당국이 탈북자들을 처벌하고 국경안보를 강화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 있다. 북한의 형법은 ‘외국화폐매매죄(제106조)’, ‘외화관리질서위반죄(제107조)’, ‘비법적으로 설비와 물자를 외화로 팔고 산 죄(제107조)’, ‘력사유적 밀수, 밀매죄(제189조)’ 등을 규정한다. 또한 북한은 출입국법을 통해서도 탈북자를 처벌할 수 있는데, 출입국법을 위반한 북한주민에게는 벌금을 부과하거나 출국금지 등의 행정적 처벌을 우선할 수 있으며 그 정상이 무겁다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제45조).144) 처벌 규정을 다양하게 둠으로써 제도 운영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탈북자들에게 당국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서 책임을 묻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이기태 외, 2018, 「국경과 국경안보에 대한 북한의 인식」, 『북한과 주변국의 국경안보』, 통일연구원.)

> 관련 영상 링크: 도강하다 북한군 총에 맞은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여성

NS

선택1

도강 계획을 세웠다. 이주일 정도면 조금씩 집의 물건을 팔아서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국경을 안전히 넘기 위해서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국경을 넘어서 아버지의 지인인 조선족 집으로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필요가 있다. 돈이 한정적인지라, 두 개의 안전장치를 모두 마련할 수는 없다.

국경경비대원에게 뇌물을 고여 안전하게 국경을 넘는 방법을 택하든, 국경은 어떻게든 우리 가족 힘으로 넘어가고 중국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아버지 지인의 집으로 데려다 줄 브로커를 소개 받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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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2

경비대원이 뇌물에 만족하며 도강을 눈감아주기로 약속했다. 밤이 깊었고 네 식구는 가볍게 짐을 꾸려 압록강변으로 발을 옮겼다. 약속대로 경비대원은 우리가 건너기로 한 지역과 떨어진 곳에만 조명을 비추고 있었다. 다행히 강이 단단히 얼어서 빠르게 강을 넘을 수 있었다.

이제 공안의 눈을 피해 아버지 지인의 댁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다만 밤의 어둠에 몸을 맡긴 채 무작정 이동할 것인지, 아니면 브로커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고 들은 곳으로 먼저 이동해서 후불을 하겠다고 하면서 도움을 요청할지가 고민이다. 혼자 몸이라면 무작정 달려 아버지 지인 댁으로 가겠지만, 아이 둘과 아내가 함께다.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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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3

귀동냥으로 들었던 지역에 도착하여, 운이 좋게 브로커와 접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이동할 삯을 전부 지불할 수는 없는 상황. 사정을 말하니 조선족 지인 댁에 가서 그 분께 돈을 빌려 줘도 괜찮다고 한다. 혹은 가족들은 그 댁에 두고 내가 취직하여 임금으로 수수료를 내는 방법도 있다고 하여, 일단은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지인의 댁으로 이동하였다. 차에 타서 멀어지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작은 아이가 스르르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심양시 상산에 있는 조선족 지인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수수료를 넘겨줘야 하는데, 당연히 턱 없이 부족하다. 갑작스럽게 4명의 군식구를 떠안게 된 아버지 지인에게 돈까지 빌려달라고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돈은 지불해야 한다. 선택은 두 가지, 브로커가 소개해주는 일자리에 취직하여 그 월급으로 수수료를 내든가, 아버지 지인에게 도움을 받는 김에, 중국에 머물며 아내와 일하여 신세를 갚을테니 수수료를 먼저 대납해주실 수 있는지를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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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4

지인 댁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늘어난 것을 수상하게 여긴 옆집 사람의 고발로 공안들이 지인 댁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숨어있던 골방은 들키지 않았다.

그날 새벽, 어둠이 짙게 깔렸을 때 아버지 지인이 우리를 깨워 국경으로 가는 차를 지금 탈 수 있다면서 떠나라고 하셨다. 운이 아주 좋은 거라고 하시며, 꼭 한국에 가서 연락하라고 하신다. 바로 중국의 남쪽으로 이동하는 차량에 올라탔다. 동물 사료를 실은 트럭에 올라 24시간 이상을 달렸다. 여기가 아직 중국인지, 아니면 국경을 넘었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브로커는 비탈진 산길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반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다시 왔고, 브로커는 이제 차를 옮겨 타라고 했다. 이 사람들이 누구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었으나 이제 와서 이들을 의심하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새 우리는 강가에 도착했다. 6인승 보트가 있다. 운전하는 이는 생전 처음 듣는 말을 쓰고 있다. 중국은 애진작에 넘었었나보다. 보트 운전기사의 손짓을 따라 보트를 탔고 강 건너편으로 이동하였다. 브로커는 타지 않았다. 강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운전기사는 우리보고 내리라고 손짓하였다. 조심스럽게 땅에 내리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위기다. 다시 보트를 타고 강 반대편으로 이동할 것인가, 아니면 땅에 조용히 내려 몸을 숨긴 다음 움직일 것인가. 브로커가 강 반대편에 있으니 그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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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그 때 강둑으로 옮겨지던 발자국 소리가 돌아섰고, 점점 인기척이 멀어졌다. 보트기사가 손짓을 하며 ‘폴리스’ ‘폴리스’ 하였고, 그때서야 태국에 도착하면 경찰서에 가서 북한에서 왔다고 하라던 브로커의 말이 생각났다. 여기가 태국이었구나. 우리는 당장 길가로 달려나갔다. 때마침 달려오는 차량에 손을 흔들면서 ‘폴리스’ ‘폴리스’를 외쳤다.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우리에게 뭐라고 물음을 던졌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니 그가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타라고 하였다. 바로 차량에 탑승했고 몇분 지나지 않아 경찰서에 도착했다. 경찰은 우리를 작은 방으로 데려다 놓았고, 얼마 뒤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먼길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하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긴장이 탁 풀렸다. 드디어 우리가족에게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이다. 안전한 삶이.

실패

가재도구와 몇 귀중품을 팔아 모은 위안화를 가지고 브로커를 잘 아는 지인의 집으로 갔다. 한참동안 브로커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브로커와 접선할 시간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데 보위부원들이 집을 습격했다. 내가 가재도구를 조금씩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을 누군가 심상치 않게 보고 신고를 한 것 같다. 나는 물론 지인까지 모두 보위부로 끌려가게 됐다.

추가정보

- 강을 건넌다는 것

> 사진 : ‘도강하는 북한 주민’

> [학술자료] 도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어떤 법을 근거로 하는가?

“북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탈북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북한 형법 221조 비법국경출입죄이다. 이 법은 비법적으로 국경을 출입한 자를 1년 이하의 로동단련형에 처하며, 그 정상이 무거운 경우에는 5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처벌규정의 이원화는 단순생계를 위한 탈북과 체제이탈로의 탈북을 구분하여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비법국경출입죄와 조국반역죄 규정 이외에도 북한 당국이 탈북자들을 처벌하고 국경안보를 강화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 있다. 북한의 형법은 ‘외국화폐매매죄(제106조)’, ‘외화관리질서위반죄(제107조)’, ‘비법적으로 설비와 물자를 외화로 팔고 산 죄(제107조)’, ‘력사유적 밀수, 밀매죄(제189조)’ 등을 규정한다. 또한 북한은 출입국법을 통해서도 탈북자를 처벌할 수 있는데, 출입국법을 위반한 북한주민에게는 벌금을 부과하거나 출국금지 등의 행정적 처벌을 우선할 수 있으며 그 정상이 무겁다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제45조).144) 처벌 규정을 다양하게 둠으로써 제도 운영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탈북자들에게 당국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서 책임을 묻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기태 외, 2018, 「국경과 국경안보에 대한 북한의 인식」, 『북한과 주변국의 국경안보』, 통일연구원.)

> 관련 영상 링크: 도강하다 북한군 총에 맞은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여성

실패

무작정 걸었다. 초행길인데다, 사위가 어두워 어디로 가야할지 더더욱 알기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중국 공안이 나타났고, 우리 가족의 탈북 시도는 금세 발각되었다. 강을 다시 넘는 것은 왜 이리 쉬운지.. 우리는 곧 양강도 혜산시 보위부 구류장에 구금되었다. 내일이 암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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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구금시설

북한의 구금시설은 일반적 범죄와 정치적 범죄를 분리하여 관리하는 이원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일반 범죄에 대해서는 형 확정자에 대한 처벌을 위하여 로동교화소와 로동단련대가 설치돼 있으며, 재판기관 중에 잇는 미결 수용자의 구속을 위하여 구류장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범죄자들을 수용.관리 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관리소)에 대해서는 형법, 형사소송법 상 그 근거규정이 없다.
교화소, 노동단련대, 구류장, 정치범수용소 이외에 여행목적지 위반자, 여행기간 위반자, 탈북자 중 체포되어 송환된 자 등에 대한 조사를 위하여 기차 환승역이 있는 도시나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대 등에는 집결소가 설치돼 있다.

>관련 증언: 구금시설 내의 인권 범죄
“그 언니는 형을 15년 받고 들어왔는데 00교화소에서 한 5년 정도 살았더라고요. 그 언니가 예뻤어요. 담당하던 보위지도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거의 뭐 매일 (성폭행)하다 했죠. 그런데 그 언니가 임신을 해서 한동안 복잡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보안과로 막 불려 다니고 막 그랬거든요. 그런데 임신한 상태로 죽었어요. 00반에서 그 언니가 거기서 밧줄로 이렇게 묶여가지고 죽은거에요. 2003년도예요. 근데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죠, 거기는 매일 선생님들한테 성폭행당하고 산다고 보면 돼요, 특히 00반 같은 데는요.” (통합인권DB 증언자료 - 성폭행, E14-I-3678, 현00, 함경북도)

> 관련동영상 : 북한인권범죄와 관련하여 데이터를 구축한다는 것의 의미(‘북한인권 가해자 데이터 구축 프로젝트 소개’)

실패

브로커의 소개로 일을 하기 위해 아내와 각각 다른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웬 시골집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황망하여 그에게 버섯 농장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물어봤지만, 그는 나를 시골집 주인에게 떠넘기고 돈을 받아 챙겼다. 아내는 어떻게 된 것일까. 브로커에게 달려갔지만 돌아오는 건 시골집 주인의 매. 꼼짝없이 이 집의 종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내와 아이들 걱정만 할 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으니 도망도, 남한으로의 이동도 불가능하다.

실패

그때 우리 보트를 향해 강한 조명이 비췄다. 우리는 순식간에 라오스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라오스 공안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은 우리에게 냉혹했다. 우리를 구해줄 사람들이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인가. 며칠 간 빛도 잘 들지 않는 구류장에 갇혀 있다가 중국으로 이동되었고, 바로 다음 날 중국 쿤밍에서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북송되었다. 인생 첫 비행기가 지옥을 향해 가는 여정일 줄 알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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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된 청소년들이 있었다

2013년 남자 7명, 여자 2명으로 구성된 북한 청소년 9명이 라오스에서 강제 북송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중국 지리넝 창바이현으로 탈북하였는데, 이 때 미국 영주권자인 선교사 부부를 만나게 되어 제3국으로 탈출 후 한국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라오스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길을 헤메던 중 국경 수비대에 발각되어, 라오스 정부에 의해 구금되었고 결국 이들은 평양으로 북송 조치되었다. 사건 초기에는 청소년들이 한국 대사관으로 인계될 예정이었으나 북한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라오스 정부가 북한 대사관을 통해 바로 중국으로 아이들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한국 정부의 안일안 대처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 관련기사 : 북송된 탈북 청소년 어떻게 될까? [박선영, 물망초재단 이사장·전 의원]
(https://www.ytn.co.kr/_ln/0101_201306031657136667)

> 관련동영상 : 강제 북송의 ♨충격적인 실태♨ 라오스에서 붙잡혀 강제 북송된 명옥의 아들이 북한 선전 매체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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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들어는 봤는데, ‘고난의 행군’이 뭘까?

고난의 행군은 본래 일제강점기 당시 김일성이 이끌던 항일 빨치산이 만주에서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100여 일간 행군한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경제상황이 극히 어려워진 것에 더해 자연재해까지 덮쳐, 최소 수십 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을 당적 구호로 내세워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사회적 이탈을 막고자 했다. 즉, 김일성이 “일제하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광복을 이루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주민들이 현재의 난관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김정일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시련을 극복하고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북한은 역대 ‘고난의 행군’에 대한 역사적 개념을 정리하면서, 김일성이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중국 몽강현 남패자(현재 길림성 정우현)에서 압록강 연안 장백현까지의 100일간의 행군을 ‘첫 번째 고난의 행군’,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전후하여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까지를 ‘두 번째 고난의 행군’, 그리고 상기 1996~2000년간을 ‘세 번째 고난의 행군’으로 평가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21세기 정치학대사전 ‘고난의 행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27444&cid=42140&categoryId=42140)

> 관련 증언 :
“죽은 시체를 봤습니다. 조00 이라고 굶어죽었습니다. 아이하고 처하고 서이 살았는데 농장이라는 게 분배를 하나도 안 주고 군량미로 다 가져가니까 봄이 돼서 3월 달인데 풀이 조금씩 올라오지요. 그거 뜯어 먹으메 하도 굶으니까 죽었단 말입니다. 내 (한국) 올 때 그렇게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농장이 100세대가 있으면 70세대가 먹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칡뿌리 캐서 먹습니다. 21세기에 칡뿌리를 먹는다면 누가 곧이들을 사람이 없지요. 남한에서는 빌어먹어도 입밥을 빌어먹겠는데. 여기 사람들은 상상을 못하지요.”
(통합인권 DB 내 증언자료, 아사, E14-I-1399, 양00, 남, 함경북도)

“북한이 고난의 행군 들어가면서 농사를 짓게 되면 군사식량으로 먼저 나갔어요. 군사품 떼고 나면 일 년에 7달 정도 식량밖에 안돼요. 매 죽을 쒀 먹고 이래야 하는데 죽 쒀먹어도 안되니까 사람들이 식량 조절 못하고 다 먹고 나면 없어요. 농촌에서는 간부들이 뒤에서 자기 것 챙기고 이런게 심했던 것 같아요. 고난의 행군 시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우리 마을에도 아기도 다 굶어죽었어요. 애기가 먹지 못해서 완전히 해골 됐어요. 이00은 한 집안 다 죽었어요. 아이 한 명인데 엄마, 아빠 다 죽었어요.”
(통합인권 DB 내 증언자료, 아사, E-14-I-2663, 이00, 여, 함경북도)


- 도강에는 ‘도강증’이란 방법도 있다?

일반적인 출입국 절차와 달리 북-중 접경지역에는 또 다른 형식의 국경 왕래 방법이 있다. 조중 국경의 경우, 압록강 변에 살고 있는 북한과 중국의 주민들은 ‘도강증’으로 서로의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일명 ‘도강증’으로 불리는 국경지역 출입국증명서는 각 시,도 국가보위성에서 발급한다. 친척방문을 위해 중국에 갈 경우에는 중국의 친척이 정해진 양식에 맞게 초청장을 작성하여 당국에 제출하면 확인 작업을 거쳐 통행증을 발급받는다. 그러나 위조나 뇌물을 써서 당국의 통제를 우회하는 방법도 있다. 뿐만 아니라 합법적 절차를 통해 출입국증명서를 신청하더라도 뇌물 없이는 발급이 어렵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나 김정은 집권 이후 국경통제가 강화되면서 통행증 발급 자체가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2012년까지는 중국에 친척이 없어도 뇌물로 통행증 발급이 가능했으나 2013년부터는 뇌물로도 발급이 불가능해졌다고 한다.

> 사진 : 한겨레 기사 내 ‘주민국경통행증’

> 관련기사 링크 : “압록강은 폐쇄된 국경이 아니었다.”
(출처: 주간조선 2278호,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78100009)

약 1년6개월 동안 단둥에서 현지조사를 했던 단둥 지역 전문가 강주원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북한이 완벽하게 폐쇄된 국가라는 전제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국경이 있되 필요에 따라서 허물고 다시 짓는 곳이 단둥이다. (...) “한 해에만 10만명이 중국 땅을 밟는다고 하죠. 그런데 이건 아마 비자나 여권 등 공식적인 루트로만 잡힌 통계일 거예요. 상당히 많은 수는 ‘도강증’이라는 걸 발급받아 단둥에 와요.” 1개월에서 3개월까지 국경 반경 수십 킬로미터 내에서 체류할 수 있는 도강증을 받은 북한 사람들은 일일노동을 하거나 직접 가게를 운영하기도 한다. “보통은 6개월, 많으면 1년 가까이 머물기도 하죠.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탈북 의지가 없어요. 돌아가려고 일하는 거예요.” 이들이 돌아가며 한국산 물건을 잔뜩 사들고 가서 파는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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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얼굴의 브로커 : 탈북 브로커는 ‘좋다’ ‘나쁘다’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브로커의 두 얼굴을 각각 보여주는 기사를 소개한다.

> '어머니 모셔올게' 탈북민 상대 사기…브로커 벌금형 (연합뉴스, 2020-11-12, https://www.yna.co.kr/view/AKR20201112059600065)

> 탈북자 500명 구한 '중국인 쉰들러', 한국서 난민 인정 (조선일보, 2018-12-2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24/20181224002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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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과정에서 인신매매를 당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 북한인권정보센터의 통합인권 DB 자료를 보면, 강제매춘 및 인신매매 사건 수는 1990년대 1,138건으로 조사되었다가 2000년대 2,123건으로 급증하였다. 특히 인신매매와 강제매춘 사건의 97%가 중국에서 이뤄지는 것은, 북한이탈 과정에서 북한이탈주민의 취약한 상태를 악용하는 경우가 빈번함을 보여준다.

> 인신매매 관련 영상 링크: BBC 코리아 특별취재: ‘섹스캠’에 시달린 20대 탈북 여성의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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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지 않은 한국행


> “중국과 라오스 공안에 붙잡히면 죽고, 태국 경찰에 붙잡히면 산다”

태국 북부 치앙라이(Chiang Rai)주는 최대 탈북 루트로 통한다. 탈북자 상당수가 메콩강을 건너 태국 땅을 밟은 후 한국에 들어온다. (중략) 치앙라이주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는 북·중 국경에서 장장 1만여km 떨어져 있다. 북한에서 치앙라이까진 기차와 버스, 승용차, 배 등 항공기를 뺀 대부분의 교통수단이 이용된다. 그야말로 대장정이다. 중간중간 안전가옥이나 은신처에 머물기도 한다. 중국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할 땐 밀림의 가시덤불을 걸어서 통과해야 한다. 험난한 산악지대를 오르내려야 한다. 중국과 라오스의 공안(公安) 단속과 검문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관문인 메콩강을 건너야 한다.
그들은 칠흑같은 심야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탈북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메콩강에 띄워진 작은 배에 몸을 싣는다. 라오스와 태국 사이 메콩강 폭이 좁은 곳은 200여m. 그 짧은 거리가 생사의 마지막 고비일 수 있다. 무사히 건너면 탈북 루트의 9부 능선을 넘는 셈이다. “탈북자들은 북한 땅을 떠나 빠르면 보름, 더디면 2~3개월 만에 태국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태국 현지 교민과 주민들은 전했다. 그것도 ‘운 좋은’ 경우에 한해서다. 중국이나 라오스 공안에 체포되면 북송(北送)된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탈북자들은 “중국과 라오스 공안에 붙잡히면 죽고, 태국 경찰에 붙잡히면 산다”고 말한다. 태국은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원하는 국가로 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메콩강을 건넌 탈북자들은 자진해 태국 경찰서 문을 두드린다. 치앙샌, 치앙콩(Chiang Khong), 농카이(Nong Khai) 등 메콩강변 국경도시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수도 방콕에 있는 수용소로 넘겨진다.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거기서 한동안 대기하다 한국에 들어와 국정원 등의 조사를 받는다. 이후 경기도 안성에 있는 통일부 산하 탈북자 교육기관인 ‘하나원(정식명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 입소한다. ‘탈북 대장정’이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최대 탈북 루트 ‘골든트라이앵글’을 가다“ 시사저널 2019-07-03)
(링크: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8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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