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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나는 1932년, 경기도 군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1950년 3월, 군에 입대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우리 집에서는 아직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내가 대표로 입대를 했다. 나는 서빙고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처음엔 의정부에 있던 7사단으로 이동해 박격포수를 보직으로 받았다. 이후 헌병대에 선발돼서 파주 전방으로 이동해 복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초소 경계근무 장소는 한탄강 부근 무역장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료들은 전부 외출을 나가 있었고 나는 보초를 서면서 졸고 있는데, 어스름한 새벽하늘을 뒤덮은 새까만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 무언가는 사람 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떼로 남침해오는 인민군 무리였다. 순식간에 자동총과 포로 무장한 인민군들이 벌떼처럼 밀려왔다. 나는 내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큰일 났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고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날아들고 옆에 있던 사람들도 피를 뿜으며 퍽퍽 나가쓰러졌다. 아무리 쏴도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뒷걸음질 치며 방아쇠를 당겼지만 결국 인민군들에게 포위되었다.

19살의 나이,
한국전쟁 발발 당일인
6월 25일 포로가 되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 그 날 나는 포로가 되었다. 아마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포로로 붙잡힌 것이 나일 것이다. 북으로 끌려가는 중에 보니 한탄강 저쪽으로 포와 군용차를 다 위장시켜 배치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인민군은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연천군 전곡에 집결시켰다. 잡힌 포로들이 많아 감당이 안 됐는지 연천으로 이동시켜서 이틀 후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기차에 태웠다. 기차에 함께 오른 국군 포로들의 육성이 들렸다.

“야, 이제 우린 죽었다. 이게 기차 태우는 거 보니까 시베리아로 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울먹이며 말했다. 이제 시베리아로 가면 고향으로 돌아오긴 다 틀린 거라고. 근데 막상 한참을 기차를 타고 달려 도착해서 밖을 내다보니 ‘회령’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였다.

함경북도 회령시
회령포로수용소에
도착하다

회령에 도착해서 포로수용소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도중에 다른 전투부대에서 온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그분들 덕에 큰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가슴팍에 있는 헌병 뱃지를 보더니 소스라치며 그거 얼른 떼라고, 큰일 난다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회령 포로수용소에 가니 알 수 있었다.

수용소에 도착해서 인민군은 1중대, 2중대, 3중대 사람들을 분류했다. 그 중에서도 부상당한 사람들, 헌병 뱃지를 단 사람들은 따로 소집되어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좋지 않은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회령 포로수용소는 이전에는 인민군 군사훈련소 역할을 했던 곳 같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군부대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해방된 후 인민군대가 그 시설을 그대로 인민군 부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후 인민군은 6월 25일 전쟁 때문에 전방으로 이동해야 했고 부대는 비어있었다. 그래서 포로들을 후방의 빈 부대에 몰아놓은 것이었다. 회령 포로수용소의 크기는 정말 컸다. 17개 중대가 한 번에 수용되는 크기였고, 한 개 중대가 300명 정도 되어 보였다.

포로들이 정말 빼곡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무섭고,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

아오지 탄광에 구금되다.
이후 궁심 탄광에서
20대를 시작하다.

회령 포로수용소에 수감 된지도 4개월, 1950년 11월에 들어선지 조금 지났을 때였다. 나를 포함한 포로들은 전부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졌다.

포로들은 아오지탄광에서 탄광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 가둬두는 감옥 같은 곳에 다시 갇혔다. 변소 물이 넘쳐서 오물이 바닥에 흥건한 곳에 인민군은 우리를 밀집시켜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병이 났는데 포로들은 치료를 받지 못했고, 상처는 몸을 파고들어갔다. 운동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이 있어 모였는데 상처를 입은 한 사람이 거세게 항의를 했다.

“야, 이 새끼들아! 사람이 죽어간다고 하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서 아우성쳤다. 그러나 끝끝내 그 사람은 죽었다.

아오지탄광에 구금된지도 시간이 조금 지나, 인민군은 포로병들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몇 명이 사라지고 또 그 다음날 몇 명이 사라졌다. 포로병들은 조금씩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길게 머물렀다. 3~4개월 복구 작업이라며 벽돌도 날라야 했고, 흙도 개야 했다. 시멘트도 개야 했고, 청소도 해야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51년도 2월이었는지 3월이었는지, 나는 회령에 있는 궁심 탄광에 배치됐다. 그땐 몰랐다. 내가 탄광에서 25년의 세월을 보내게 될 줄은.

탄광에서의 고된 노동

알고 보니 나처럼 다른 포로들도 남쪽에서 가장 먼 북쪽 끝 온성, 청진 이런 곳으로 데려 갔더라. 남쪽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최대한 먼 곳으로 데리고 간거다. 나처럼 대다수가 탄광으로 배치됐는데,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궁심탄광에 배치된 후 40년 동안 하루의 일과는 동일했다. 석탄을 채굴하는 것과 지쳐 쓰러져 잠드는 것. 그리고 주말엔 지친 몸으로 참석해야 했던 사상학습과 생활총화.

일하러 들어갈 때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가스폭발사고로 갱도가 무너져 포로들이 죽거나 실종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살아보지 않았으면 이렇게 말해도 상상이 잘 안 갈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반사회분자로 낙인 찍혀 누구도 나를 구해줄 리 없는 어두운 탄광에서 평생을 노동한다는 것은…같은 처지에 놓여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인 포로들끼리도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포로의 신분이었기에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고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할 수 없었다. 잘못 오해를 사는 경우엔 총살이나 정치범수용소행이 자명했으니까.

처음엔 밤마다 혼자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가서 공기와 냄새와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고향, 함께 자란 사람들. 그리고 가족들은, 내 고향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지 생각했다. 나의 근원이 되었던 모든 이들, 그리고 모든 것들로부터 잊히고 사라지는 게 아닐지 걱정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내 세상 속에 존재했던 이들은 전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백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이 먼 곳, 마음의 거리로도 내 관념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와버린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캄캄한 탄광도, 포로의 삶도, 벗어날 수 없는 고된 노동의 현실에 점점 무뎌져만 가고 그렇게 본래의 나 자신도 점점 사라져 갔다.

궁심탄광에서 만난
초급당 비서

궁심탄광에서 일하던 어느 날, 탄광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나이도 많아 보이고 말도 없이 조용했다. 우리 작업반으로 들어왔는데, 누군가가 다치면 그 책임을 작업반 내에서 져야 했다. 그 사람이 나이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탄광 관리자는 그를 채탄장에 올려 보내지지 않고 평도에서 나무를 올리는 작업에 배치시켰다. 나는 작업반 내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노인의 일을 도와줬다. 그 사람은 50여 일정도 일을 한 후 떠났는데, 그 후 일주일 뒤에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노인은 나에게 장가를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아버지가 남쪽에 혼자 계십니다. 이후에 통일이 되면 집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장가를 들 수가 없습니다. 군 입대 전에 아버지가 장가들라고 하셨는데 그때는 나이도 어리다고 생각해서 아버지 말씀 안 듣고 장가를 안 들었는데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됩니다.”

그에게서는 “야, 이 사람아 자네 그러면 위에서 자네한테 의심을 두고 색안경 쓰고 볼 수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그는 회령시 우마차 사업소 초급당 비서였다. 탄광에서 일할 적에 청고추처럼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노인을 일시키지 않고 배려해 줬다며 고마워했고 그 답례로 좋은 집안 여자랑 맺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결혼을 결심하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현실을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돌아갈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고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북한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주변에 거슬리는 일을 해서는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초급당 비서가 소개해 준 사람을 만났고, 결혼도 하게 됐다. 북한에서는 당이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처갓집은 초급당 비서가 소개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로 결혼을 승낙했다. 그래서 내가 포로병 출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 출신, 북한 말로 ‘토대’는 이후에 막내 처남에 의해 밝혀졌다. 막내 처남이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주민등록 사업하는 곳으로 배치를 받은 후의 일이었다. 당연히 주민등록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매부의 문건에 포로병이라고 나와 있던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포로병이라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되었지만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인 후 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여 장인, 장모 환갑, 진갑까지 다 차려드렸다. 처제들과 처남들의 시집, 장가까지 전부 책임졌다. 그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가족들은 아무 말 없었다. 탄광에서 목숨 걸고 일하면 그래도 벌이는 적지 않게 벌 수 있었고 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도 죄가 되는 세상

그렇게 나는 남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헌신했다. 그러던 어느 해 4월, 나는 식수 사업에 동원됐다. 산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파견근무를 간 것이다. 가면서 차에다가 술을 싣고 갔다. 당시 작업반에는 여자가 많았는데, 고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는 여자들도 술을 마시고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여자가 술을 마시면 정말 큰 수치로 여겨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결국 술 먹는 사람이 적으니 술은 전부 술꾼들 차지였다. 그렇게 나도 술을 마셨고 알딸딸하게 취해서 집에 가기 위해 산 능선으로 올라섰는데 저 앞에 멀리 보이는 시퍼런 산이 꼭 서울에 있는 삼각산처럼 보였다. 이상했다. 헛것이 보이는 것인가. 술 기운 때문일까. 갑자기 남쪽 고향 생각, 아버지 생각, 누나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안 되겠어서 나는 길 한 쪽으로 피해 남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많이 서럽게 울었던 탓일까. 누군가에게 우는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나는 며칠 뒤에 호출을 받았고, 그들은 나에게 왜 울었는지 물어봤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나는 사실 그대로 얘기했다. 고향 생각도 나고 부모 생각도 나고 그리워서 그리고 서러워서 울었다고 했다. 답변으로 경고가 돌아왔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정신 똑똑히 차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잘 생각해 보고 행동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여기는 북이다.

남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북에 있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시간이 지나도 고향도 아버지도 가족들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너무도 그리웠다. 하루 아침에 헤어져 평생을 못 볼 줄 누가 알았을까. 전쟁이 이렇게 우리 가족을 아니 수많은 가족들을 박살내버렸다. 인민군에게 끌려와 고향에 못 돌아간 것도 서러운데 포로병 출신으로 사는 것은 너무 서럽고 고달픈 인생이었다.

나에 대한 서러움보다도 특히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했다. 북에서는 출신 성분이 신분 제도로 작용한다. 포로병들의 아이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하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대학에 갈 수 없다. 대학에 가는 것도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도 포로병 출신의 자녀를 추천해주지 않았다. 전부 지배인 자식, 초급당 일꾼 자식, 간부 자식들 써주려고 하지 소위 ‘토대’ 안 좋은 것들은 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포로병 출신인 아버지를 원망하는 애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 딸들도 “뭐가 어떻게 돼서 아버지는 그런가?”
“왜 우리는 대학을 못 가는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포로병 출신이어서 대학에도 못 가는 딸들을 보면 부모로서 마음이 찢어졌다. 내가 힘든 것보다 가족들이 나 때문에 고통 받는다는 사실이 가장 슬프고 힘들었다. 그때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탄광을 나온 뒤
몰려 온 상처의 아픔

국군포로라는 이유로 내 나이 20살, 그때부터 52년 평생을 탄광에서 보냈다. 많은 또래의 포로들이 포로생활 도중 죽거나, 탄광의 고된 환경과 안전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연로보장의 나이까지 버텨내어, 상상도 어려웠던 고향땅을 밟을 수도 있게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북에 있을 때 한창 연로보장(은퇴) 후 포로병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들 싫어한다. 하지만 먹고 살기위해 쉴 수는 없고 산에 다니면서 고사리, 고비, 송이버섯 같은 것들을 뜯어야 했고, 마누라는 뜯어온 것들을 잘 가공해서 시장에 가서 팔았다. 다듬어 진 것들을 중국 사람들이 와서 사갔다. 그러면 우리는 그 돈으로 국수를 사다 먹고는 했다.

한번은 산에서 나물을 캐고 나오는데 갑자기 세상이 샛노래보였다. 온 세상이 그냥 전부 노랗게 보였다. 그래서 속으로 ‘야, 이거 큰일 났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앉아서 조금 쉬는데 지나가던 한 청년이 말을 걸었다.

“아바이, 어째 여기 앉아있어요?”

그래서 힘을 내어 청년에게 답하며 물었다. “여기 와서 나 좀 봐 주시오. 그 쪽은 이 길이 무슨 색깔로 보이오?” 그러자 청년이 “아, 색깔이 뭐 있어요. 그저 시커먼데” 라고 답해왔다.

지금 모든 게 다 샛노래 보여서 이렇게 앉아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청년이 대답했다. “아유, 그게 배가 고프면 허기증이 나면 그럴 때가 있어요. 아바이 여기 앉아 계세요.”

그러더니 그 청년은 산에 올라가 긴 나뭇가지를 꺾어 내려왔다.
“아바이 이거 붙들고 저 따라오시면 돼요.” 그렇게 그 청년은 나를 동네까지 데려다줬다. 그게 얼마나 고맙던지…

그렇게 나는 나이들어 가고 있었고, 내 육신은 참아왔던 아픔을 이제야 느껴가고 있었다. 쉴 틈 없는 집단생활과 탄광에서의 집단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니 고향을 떠나 <국군포로>라는 신분으로 나와 가족이 그동안 수 없이 겪은 서러운 일들과 고생들이 순간에 복받쳤다. 그동안 버텨냈던 심신이 깊게 패인 상처의 고통을 느껴가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말이 사실일까.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같은 포로병 출신 친구의 조카가 중국에 사는데, 일 때문에 한국에 오고 가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써줬더니 기적적으로 사촌 형과 연락이 닿았다. 형을 통해 아버지와 삼촌은 이미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이후 사촌 형은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그렇게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설렘이 커지던 도중, 사촌 형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에서 넘어올 당시 몸이 많이 아팠다. 아마 그때 넘어오지 못했다면 거기서 죽었을 것이다. 북에서는 인민반에서 늙은이들이 앓으면 인민반 반장이 사람을 조직해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저녁 두 사람 씩 경비를 세운다. 아픈 노인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아팠다. 바깥에 있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앓던 중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브로커라는 사람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누군가 나를 만나러 두만강 저 쪽 건너 중국에 와 있으니 오늘 저녁 몇 시에 거기에 가서 만나고 다시 돌아온다고. 하지만 나는 알았다. 다시 돌아오는 여정은 없다는 것을.

가장 아끼던 옷을
훌 벗어 던지고

그렇게 연락이 온 뒤 신기하게도 앓아서 거의 죽어가던 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두만강 건너는 곳까지는 40리 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내가 걸어서 갔다. 가보니까 브로커 애들이 군대를 끼고 사람을 넘기고 있었다. 군대가 자동총을 메고 나와서 젊은 브로커 애들과 얘기하고 초소에 연락하더니 우리한테 낮에는 밝아서 못 지나간다고 했다. 좀 어슬어슬 어두워야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조금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슬슬 어두워진 뒤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물에 들어가니 센 물살에 내 몸이 둥둥 떴다. 힘이 없었다. 그런 나를 젊은 브로커 두 명이 내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니까 젖은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때 입었던 옷이 장가들어서 해 입은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이었는데, 그걸 그냥 훌 벗어서 던져버리고 브로커들이 가져온 중국옷을 입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1950년 고향의 향기는 없지만 그래도 나의 조국으로 가는 길

그렇게 브로커들의 인도로 나이든 몸으로 오토바이도 타보고 산 넘고 물 건너 중국 공안의 체포 위기에도 빠져나와 태국까지 왔다. 나는 태국이란 나라를 처음 가봤는데, 도로에 차들이 그렇게 많이 다니는 건 그 때 처음 봤다. 브로커는 “여기 자동차 다니는 건 서울이랑 비교할 수 없어요. 서울에는 차가 훨씬 더 많이 다녀요”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 내가 그동안 그리워했던 고향의 모습이 이제는 남아 있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태국에 한 달 넘게 계속 있어야 했다. 브로커들은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이동을 하지 않는지 물어봤더니 돈을 안 줘서 그렇다고 했다. 돈을 어디서 주는 것인지 물어봤다. 대한민국에서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정부기관에 전화를 연결해 달라고 했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재까닥 받았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가명)이고 전쟁 때 포로로 잡혀서 북에서 살다가 지금 태국에 나왔습니다. 내가 신분을 다 밝혀도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는데 이거 국적이 없는 귀신이 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한국에도 국적이 없지 북쪽에서 도망쳐 나왔으니 북한에도 국적이 없지, 국적이 없는 귀신이 되었는데 나라에서 어떻게 좀 대책을 세워 주실 수 없을까요?” 상황을 이야기하니까 나보고 잠깐 기다리라며 브로커를 바꿔달라고 했다. 브로커가 전화를 받아 또 통화를 했다. 나를 한국으로 보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 며칠 안 돼서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감격적인 귀환의 순간, 그리고 북에 있는 가족

2003년 00월 00일 귀환, 이제는 꿈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53년 만에 남한에 도착했다. 이게 진짜 한국인가 싶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공항에 새카맣게 나와 있었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야단이 났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도 국군포로 출신인데, 나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왔을 적에 방송에도 나오고 한국에서 환영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방송에 나간 날로 북에 있던 그의 가족이 하루아침에 잡혀갔다.

그래서 염치를 불구하고 국정원 선생한테다가 그 얘기를 했다. “이런 사람이 나보다 일찍 여기를 왔었는데, 방송에 나가자마자 그 날로 가족이 모조리 잡혀갔다”고 나도 북에서 힘들게 살았던 이야기들 수많은 사연들에 대해 다 이야기 해주고 싶지만, 내가 여기 왔다는 게 알려지면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얘기하는 걸 가만히 듣더니 국정원 선생이 기자들을 몽땅 보냈고 나에 대한 정보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그때 내 얼굴이 나갔다면 북에 있는 우리 마누라, 딸들 그리고 마누라 친정까지 몽땅 잡아갔을 테니…아주 섬뜩하지’

후에 마누라는 내가 남한에서 데려오려 노력했지만 “수경이 할아버지, 이제 당신이나 나나 다 늙어서 죽게 됐는데, 우리가 좀 힘들더라도 아이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수경이 할아버지가 거기 넘어갔다는 걸 이쪽에서 알면 내 형제들, 친척들이 여기서 못 견딥니다. 아이들을 보내겠으니 아이들에게 정을 붙이고 사시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외손녀들은 여기에 넘어와서 나랑 같이 산다. 우리 마누라는 그렇게 저쪽에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저쪽에 있을 적에 우리 마누라도 참 고생이 많았다. 젊었을 적엔 당에 입당까지 했던 열성 당원이었지…성분 좋은 사람인데 포로병한테 시집와서 잘 나가던 거 다 꺾어졌지. 그러면서도 한 번도 나한테 안 좋은 소리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누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53년만의 명예회복

지난해 6월에는 7사단 행사에 초청되었다. 내가 뭐라고 사단장이 직접 나와서 감사장도 주고, 젊은 군인 들이 나와서 박수도 쳐주었다. 참 민망하기도 하고 고마웠다. 행사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흐르더라.

우리는 전쟁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보기 위해선 헤어져야 했고, 포로라도 되어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많은 포로가 된 전우들에게 영원한 헤어짐을 선고한 듯하다. 수많은 전우들이 수용소와 탄광에서 목숨을 잃었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들은 대부분 90세 전후의 나이다.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이젠 고향땅을 밟겠다는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려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53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나는 그에 비하면 정말로 행운아였고, 지금은 군에서 초청도 받고 기억해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리움

이제는 통일이 되어서 남은 자식들이라도 보고싶은데 요즘 뉴스를 보니 참 마음이 갑갑하다. 북에 있을 적엔 고향에 있던 가족들이랑 생이별하고, 남에 있을 적에는 북에 있는 가족과 생이별이니. 죽기 전에 한 번만 두 딸을 만나봤으면 좋겠다.

저쪽에 있을 적에 딸들도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여기 한국 와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북에서는 포로의 자식으로는 더욱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서 더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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