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소련군에 의한 북한지역주민 대상 약탈, 강간

1945 8 9 종전을 얼마 앞두고 대일선전포고를 소련군은 10일부터 북한으로 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역사상 최초로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였고, 이에 소련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북한 지역에 진출할 있었습니다. 8 24 소련군 25 사령관 치스차코프(I. M. Chistiakov) 대장은 선발대를 거느리고 평양에 진주했고, 이후 한반도 북부를 점거한 소련군 일부가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약탈과 강간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경직 목사가 1945 9 26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에게 도움을 요청한 영문 비밀청원서가 발견되면서 공론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탈취했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 기록했습니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소련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소련군 보고서 역시 당시의 상황을 한 목사의 청원서와 동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는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서 횡행하는 소련군들의 약탈과 폭력, 여성 강간 사례를 상세히 기록하며 군 내부에서 일벌백계로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소련군에 의한 인권침해가 횡행하자 소련 주둔군 사령부의 포고가 나오고, 만행을 저지른 일부 병사들에 대한 공개총살이 이뤄지면서 소련군 병사들의 비행은 감소하였습니다.

1946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설

1946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지역을 총괄하는 통일적인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토지개혁 추진과 함께 생산수단의 국유화조치 등을 단행함으로써, 실질적인 정권기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대규모 난민 발생

1946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노동당에 의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그에 따라 주민들에 대한 신념, 종교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 이뤄졌습니다. 더불어 토지개혁 등에 따른 재산권 탄압도 이어지면서 지역민들 상당수가 삶의 터전이었던 북한 지역을 떠난 것으로 파악됩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안전을 위해 고향을 뒤로한 난민의 수가 100 명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조선 남녀평등권법령 발표

북한은 1946 7 남녀평등권법령을 제정하여 남녀 평등의 법적,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고 공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녀성들을 집구석에 얽매여놓던 봉건적 인습을 비롯한 낡은 잔재를 없애기 위한 투쟁을 강화하여 모든 가두녀성들과 가정부인들이 건국사업에 떨쳐나선 남편을 돕고 키우며 가정 살림을 알뜰히 꾸릴 아니라 직접 건국사업에 로력적으로 도움을 주도록 하여야 이라는 부분은 평등권법령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들에게 가사노동과 더불어 국가건설사업이란 이중의 과업을 부과한 것임을 확인케 합니다.

 

 

사회주의적 소유실행에 따른 개인의 재산권 훼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3월에 토지개혁에관한법령을 발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북한 지역의 농경지 약 200만 정보 중 100여만 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몰수 되어 국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발표, 공장/광산/철도/체신/은행 등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였습니다. 중요산업국유화령으로 인해 전체 산업의 90% 이상인 1,034개소의 산업 시설이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었습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이러한 행보에 따라 개인의 재산권이 크게 훼손됩니다.

 

 

보안대의 창설

19451012일 소련군 제25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해방 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치안대, 자위대와 같은 조직들이 해산되고 보안대가 조직됩니다. 보안대는 1021일 진남포에서 노동자, 빈농 등 일반인 2,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각 도에서 도 보안대가 조직됩니다. 각 도의 보안대가 창설되면서 이들에 대한 보충과 훈련을 위해 1946년에는 신의주에 보안훈련소 제1분소’, 정주에 보안훈련소 제2분소’, 강계에 보안훈련소 제3분소등을 설치하였습니다. 보안대는 조직 시점부터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등장하였으며, 정권 장악을 위한 조직으로 편성됐습니다. 그 결과 김일성을 위시한 소위 항일유격대출신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김일성의 정권 장악과 정규 무장력 구축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미신타파 돌격기간과 종교의 자유 침해

19461113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125일부터 30일까지를 미신타파 돌격기간으로 설정하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시켰습니다. 북한 정권은 종교 자체를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규정하였기에 미신타파는 곧 모든 종교를 타파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26일부터는 이를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형태로 확장 전개시켜서, 더욱 본격적인 반 종교투쟁을 진행하였습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일정한 신자 수를 기준으로 신자 수가 적은 교회를 폐쇄하여 타 용도로 전환시키고, 교회 출석을 막기 위해 일요일을 노동일로 월요일을 휴일로 포고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습니다. 불교의 경우, 사찰을 문화재로 보존한다는 명목 하에 승려를 문화재 관리요원으로 규정하고 시주와 삭발도 일체 금지시켰습니다. 종교 억압이 계속 이어지자 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남한으로 피신하였습니다

194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1948510일 남한 총선거에 맞서 북에서는 825일 총선거를 실시했습니다. 선거를 통해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이 선출되었습니다.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는 194892일 평양에서 소집되었습니다. 회의에서 헌법이 채택되었고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일성을 초대 수상으로 선출했습니다. 김일성은 99일 내각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194899, 김일성의 주도하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고, 향후 두 정부는 민주주의라는 동일한 명칭의 체제하에 상반된 모습의 국가 체제를 구축해 나갑니다.

 

 

해외 노동자 파견 시작

김일성 정권은 1948년 소련에 처음으로 노동자들을 파견합니다. 이들은 주로 생선처리 가공 공장에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되며, 근로자의 수는 가족을 포함해 약 25천명 정도였습니다. 이후 1967년 소련과 상호우호협정을 맺은 이후, 탈선 청소년과 범죄자들을 중심으로 벌목공 15천 여명을 파견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노동자들의 해외 파견이 확대되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발발

1950625일 새벽, 북한은 기습남침을 감행합니다. 불법 남침으로 3년간 전쟁이 지속되었고 대한민국 군, 북한군, UN , 중공군의 사상, 부상, 실종자 수는 정확히 추산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민간인 학살, 포로 송환 문제, 이산가족, 전쟁 고아 등 헤아릴 수 없는 인명피해들이 발생했고 3년의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국토 전체가 초토화되어 국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북한 인민군, 남한 민간인 납치 감행

한국전쟁 발발한 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과 이북의 정치일꾼들은 이른바 모시기 공작을 통해 김규식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인사들과 출옥 인사들을 북으로 데려가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남한민간인 납치는 혼란한 전시에 단순히 발생한 우발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업을 전쟁승리에 종속시킨 북한의 총체적 전쟁전략의 일환으로서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조직적대규모적으로 수행된 반인도적인 전쟁범죄였습니다. 전시 대남한 민간인 납치는 김일성 단독이 아닌 북한주재 소련대사였던 쉬띄꼬프와의 공모와 막후에서 전쟁의 모든 것을 조 정통제하였던 스탈린의 승인에 따라 수행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교직자 살해지령 하달

한국전쟁 당시 북한 당국은 단독정부 수립과 동시에 전쟁준비에 집중하기 위하여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탄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전쟁을 시작하면서 북한 당국은 교직자를 대거 체포하였다가 1950928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에 교직자를 모두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립니다. 이에 따라 50여 명의 신부, 60여 명의 목사가 서울 근교에서 총살당했습니다. 또한 종교적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던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도 종교인 집단학살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북한 당국은 종교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종교인과의 연고만 있어도 처벌하였고, 종교인 출신은 사회적 차별을 겪었습니다. 종교의식은 모두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상, 불상, 성모상 등의 상징물들은 철거 되었고, 종교시설물은 탁아소나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51

김일성, 전쟁 책임을 물어 수년 간 정적 숙청 진행

해방 후 북한에는 여러 세력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일성파()빨치산파와 남로당 계열의 국내파’, 중국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항일 투쟁한 갑산파’, 중국 연안 중심으로 활동한 연안파’, 소련계 한인 그룹 소련파등이 있었습니다.

북한 권력의 일인자 김일성은 한국전쟁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그는 이를 정적 제거의 기회로 활용합니다. 전쟁이라는 혼란이 주는 명분을 이용해 김무정’(연안파), ‘허가이’(소련파). ‘박헌영’(국내파)를 제거하였습니다. 김무정 제2군단장을 한국전쟁 당시 평양 사수에 실패한 책임으로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갔고 1951년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허가이는 1951년 북한 부수상에 올랐지만 김일성과 대립했고 숙청 대상이 되자 1953년 자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박헌영은 한국전쟁 직후 미제간첩이라는 혐의로 갖은 고문을 당하다 1955년 사형당했습니다. 이들은 각 세력의 리더급 인물이었고, 이들을 제거한 후 김일성은 유일지배체제의 기반을 확립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국군 점령 당시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판단되는 조선 노동당원들을 제거하였습니다. 1950년부터 51년까지 최대 십만 명의 당원들이 징계를 받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1954

농업집단화의 추진

북한은 1946년 그들의 독재기구를 창립할 때부터 농업생산에 대한 협동적(집단적) 형태를 구상하여 제반 조치를 취했으나, 6.25 전쟁으로 이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전쟁 후 다시 농업 집단화를 추진하였습니다. 북한은 전쟁 중 37만 정보의 경지 감소, 25만 두의 축우, 38만 두의 돼지, 9만 본의 과수목이 피해를 입음으로써 19537월 정전 후 농촌 구성은 빈농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농촌의 빈농 구성이 농업 집단화의 유리한 조건으로 간주하여 본격적인 협동화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당국은 농업 협동조합의 가입은 농민들의 자유의사에 맡긴다고 하면서도, 가입하지 않는 농민은 불신임하는 식으로 농업 집단화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러한 협동조합체계라는 빌미로 개인의 노동권이 제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뢰 불가한 성분’ 대상 이주 계획 수립

12월 20소련 대사의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신분의 가족을 평양 및 DMZ 인근에서 기타 지역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개인이 거주하고자 하는 곳을 선택할 수 없고국가가 분류한 특정 성분을 기준으로 거주지가 강제로 결정되는 제도는 이 즈음을 기점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5

 

만성적 식량난 공식 확인

소련의 외교 문서에 의하면 1954~55년에 북한의 경제생활 수준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510일자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는 식량 상황은 4월 더욱 악화됐다. 쌀은 자유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동북(함경북도) 지방이 가장 심각한 상황이어서 정부가 그곳에 쌀 10t을 공급했으나 부족하다. 노인과 여성들은 형편이 다소 나은 남쪽으로 유랑하다 너무 쇠약해져 말 그대로 굶어죽는다. 이렇게 죽었거나 죽기 직전의 사람 20명이 4월초부터 사리원에 헝가리가 지어준 병원에 후송됐다. 검시 결과 사인은 아사로 나왔다고 밝히며 이 시기의 악화된 식량 상황을 우려하였습니다. 이 문건은 북한 내부에서 인민들의 건강권이 보장되고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체의 등장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노동당 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란 연설을 하며,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공표합니다북한은 이 연설을 시작으로, 1956년 경제에서의 자립’ 1957년 정치에서의 자주’ 1962년 국방에서의 자위’ 그리고 1966년 정치(외교)에서의 자주를 표명하면서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하였습니다주체가 주체사상으로 점차 이론화체계화되면서 김일성의 1인 지배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이러한 1인 지배권력 아래 인민들의 인권은 쉽게 침해되는 정치적 배경이 단단하게 형성되었습니다.

 

 

1956

식량 위기와 인민에 대한 비판

19564, ‘노동신문은 식량 위기를 언급하면서 대중에게 자기 비판적인 태도로 절약하고 음식을 대체하기 위해 나무껍질과 풀을 먹으라고 종용합니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적절한 복지를 제공해야 하는 국가의 본질적인 역할엔 눈을 감은 채, 북한 정부가 앞장서서 인민의 건강권 및 식량권을 뒤로 치부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8월 종파 사건

경제의 악화는 정치권에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정치권에서는 김일성의 독선적인 자세에 대한 공세가 있었고, 경제를 포함한 정책 수행상의 결함들이 김일성을 향한 아첨들로 은폐되어 정부와 당이 정확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들이 일었습니다. 이에 연안파와 소련파의 몇몇 인물들은 비판세력을 이루어, 8월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끌어내리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계획이 사전에 탄로 나면서 오히려 이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반당종파의 낙인이 찍혀 출당됩니다.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이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수백 명의 연안계와 소련계 인물들이 반혁명 종파분자혐의로 숙청되었습니다.

1956년 말부터 1960년까지 북한 정치에는 강한 숙청 바람이 불었고, 이 시기에 모든 이색 사상에 대한 강도 높은 진압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일성에 대한 비판 세력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회의 모든 것을 당과 국가 중심으로 통제하며 획일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와 개인의 신념을 표현할 권리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천리마 운동

천리마 운동은 노력 경쟁을 통하여 생산 증대를 꾀하려는 운동으로, 195612월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최대한의 증산과 절약을 내세워 이러한 노력경쟁 운동을 강화할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후 평남청년탄광돌격대·강계청년발전소돌격대·청년철도건설돌격대 등을 시작으로 노력 경쟁운동은 북한 전체 근로자들에게 확대 적용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천리마 운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593월 강선제강소의 진응원이라는 사람이 천리마작업반운동을 발기한 것이 기점이 되었으며, 이후 공장뿐 아니라 기업체, 농장, 학교 등 전 분야에서의 노력경쟁운동 형태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노동자들의 노동여건, 생활 여건의 개선 없이 개인의 경쟁만 유도하는 식으로 전개되어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57

첫 번째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 시행

1957827,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치러집니다. 이에 대해 소련 출신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브는 정당에 대한 지지율 99.92%와 투표참여율이 동일했다고 기록하면서, 이 선거가 의미가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지점은 북한 사회가 정치적 의사 표현을 자기의 소견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사회임을 보여줍니다.

 

 

 

 

 

 

성분에 따른 주민 계층 구분

조선노동당은 1957년 5월 30일 반혁명분자들과의 투쟁을 전당전인민적으로 전개하는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하면서주민들을 성분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합니다주민은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크게 분류 되었는데가장 좋은 성분은 김일성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게릴라 대원의 가족들에게 수여되었습니다그리고 가장 나쁜 성분은 기업가첩자 혐의자종교 신자에게 주어졌습니다이와 더불어 내각에서는 적대계층 사람들이 어디에서 거주할 지를 지시하는 149호 결정을 내렸습니다이에 따라 적대계층으로 구분된 이들을 더 외지고더 열악한 생활 환경으로 추방시킵니다.

 

 

 

 

식량배급제의 실시

195711식량판매를 국가적 유일체계로 할 데 대하여라는 내각결정 102호가 채택되면서 식량배급제가 실시되었습니다. 북한은 앞서 19523월 내각결정 56호로 국가식량배급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그해 5월부터 공식적으로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으나, 엄격한 의미의 식량배급제는 1957년 진행되었습니다. 식량배급은 각 직장의 경리부에서 본인과 부양가족을 포함한 식량배급표를 지급받아, 매달 정해진 날짜에 지정된 거주 지역 배급소에서 배급표와 식량대금을 지불하고 받는 형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이에 따라 경제적인 영역 뿐 아니라, 주민 이동과 일상생활을 아우르는 주민들의 삶 전반에 국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1958

주민 사상, 성향 조사사업 실시

소련 및 동구권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북한 권력 내에서도 개인숭배에 대한 반항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이에 노동당 중앙지도부는 195812월부터 1960년까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사상, 성향 조사사업을 집중적으로 실시합니다. 당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총 책임자로 하여 지방당 및 사회안전부 핵심간부 등 7천여명을 동원해 모든 주민을 출신과 사상성향에 따라 체제를 적극 옹호하는 핵심층, 반대도 지지도 하지 않으나 동요 가능한 중간층, 체제에 적대적인 반 혁명층으로 대별하는 작업을 행하였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 8천 세대가 산간벽지로 강제 이주되었고, 55백명이 노동교화소에 수용되었으며, ‘인민재판군중투쟁의 이름으로 처형 또는 구속되었습니다.

1959

지상낙원운동의 개시

2차 대전 이후 일본에는 약 240만 명 가량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194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을 창립하였고, 이를 앞세워 195912월 일본 거주 한국인들에 대한 선전 운동 지상낙원 운동(낙원으로의 귀환)’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총련은 북한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그들 필요에 따라 재화와 교육, 의료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곳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북송 재일교포 귀환 운동의 전문가이자 인도주의 운동가인 가토 히로시 씨는 도쿄의 공청회에서 거의 10만 명을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유혹했던 이러한 꿈의 건설에는 조총련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언론매체도 기여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1984년까지 북한에 귀국한 사람들의 수는 93,340여 명에 달합니다. 이들은 북한에 도착한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되었으며, 주민들로 부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했다는 이유로 의심과 감시를 받는 등 사회적 차별을 받았습니다.

 

1962

종교인들과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없다재공표

김일성은 1962년 사회안전성에서의 연설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천주교에서 집사 이상의 간부들을 모두 재판해서 처단해버렸다. 일반 종교인들은 본인이 개심하면 일을 시키고 개심하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었다고 밝히며, 종교에 대한 탄압 및 종교인들에 대한 차별 및 인권유린을 공공연하게 공표하였습니다.

 

 

 

북한-중국 간 국경선 규정, ‘조중변계조약

19621012, 평양에서 김일성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백두산 일대 국경조약인 조중변계조약에 서명합니다. 이 조약으로 중국과 북한은 국경선의 주향을 명확히 규정하고, 백두산 국경선 획분의 근거를 확정합니다이를 통해 천지의 약 55%가 북한령, 약 45%는 중국령으로 되었습니다.

1964년 북한과 중국은 조중변계조약의 후속조치가 담긴 국경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합니다. 이를 통해 압록강 및 두만강 국경은 북한과 중국의 공동 경비구역으로 하고, 불법 월경자는 관련 자료와 함께 인계해야 하지만 월경 후 범죄행위를 했을 경우에는 월경지역의 법에 따라 처리하고 관련 정황을 통보하는 등 월경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됩니다

1965

젠킨스, 주한미군 복무 중 월북

1965년 비무장지대(DMZ)에 배치돼 주한미군으로 복무 중이었던 미군 중사 젠킨스는 15일 새벽 비무장지대를 수색 정찰하는 임무 도중에 월북합니다. 그는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전사할까 두려웠고, 북한으로 갈 경우 소련으로 인도될 것이라 생각하고 북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그를 소련으로 넘기지 않고 그를 북한의 선전도구로 활용합니다. 그는 그와 함께 탈영해 월북한 동료들과 함께 사상교육을 강요 받았으며, 번역 및 영어교사일, 선전 영화의 외국인 배우 등에 동원되었습니다. 젠킨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수용소 생활 중 미군 상징인 문신 제거 명목으로 마취 없이 맨살을 파내는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젠킨스는 북으로 간 지 39년만인, 2004년에야 풀려나 아내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1966

주민재등록사업에 따른 주민 계층 세분화

북한 당국은 1966년 주민재등록사업을 진행하여 기존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3개로 구분한 주민 계층을 3개 계층, 51개 세부 부류로 다시 분류하였습니다. 주민은 직계 3대와 외가 6촌까지에 대한 조사를 거쳐 구분되었습니다. 정치적이고 인위적으로 주민을 구분해놓은 이러한 계층구조는 사회주의체제가 표방하는 평등사회와 완전히 역행하는 것으로, 북한 당국은 계층 간 불평등구조를 만들어 반당’ ‘반혁명인물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체제에 반감을 가질 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정권을 수호하려 했습니다. 당국에 의해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사회진출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 되었으며, ‘강제노동’ ‘강제수용’ ‘공개처형등 인권유린을 겪게 되었습니다.

 

1967

알리 라메다 투옥 및 고문

베네수엘라의 시인이자 언론인인 알리 라메다는 1965년 북한의 초청으로 방북하여, 김일성의 강연 내용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열성 공산주의자였던 라메다는 주민 대다수가 궁핍한 생활을 하는 북한의 모습을 보고 북한이 그가 꿈꿨던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라메다는 당국이 편지를 검열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가족들에게 현지 실상을 언급했다가 체포되었고, 1967년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령을 받고 침투한 공작원이라는 혐의로 노동교화형 20년을 선고받습니다. 1974년 석방될 때까지 라메다는 7년 간 사리원에 있는 수용소에서 하루 12시간 씩 강제노역을 하였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력과 석방운동으로 풀려난 라메다는 국제사회에 최초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문제를 밝혔습니다.

 

 

 

 

에두아르도 무리요 우가르테, 수용소에 수감

북한에서 침술 등을 공부하던 칠레인 무리요는 1967년 여름 평양과 외곽 지역을 덮친 홍수에 대한 북한 당국의 부적절한 대처에 환멸을 느낍니다. 이와 더불어 김일성 우상화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가 미국과 한국의 첩자라는 혐의를 받아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그는 19679월부터 19685월까지 9개월 여 동안 투옥되었으며, 부당한 수감 사유와 칠레에 있는 가족의 지속적인 석방 노력으로 요식행위에 불과한 재판 절차를 거쳐 추방됩니다.

 

 

 

 

갑산파 숙청

박금철, 이효순으로 대표되는 갑산파1930년대 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와 연계를 맺었던 인연으로 해방 후 권력핵심에 진입했고, 1960년대 들어서는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까지 오르는 등 상당한 지위와 권한을 누린 정치세력입니다. 이들은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다가 종파분열로 몰렸고, 19675월 당중앙위원회 제415차 전원회의에서 이들은 반당종파분자의 오명을 쓰고 숙청됩니다. 이들이 숙청된 사유 중 하나는 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지정해 각급 당조직에 하달한 것으로,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하는 반당종파행위를 행했다는 게 이유가 됐습니다. 당시 갑산파 숙청을 주도한 인물은 김정일로, 이때 그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이었습니다. 갑산파의 제거로 김일성은 1인 지배체제를 더욱 단단히 확립하게 됩니다.

 

 

 

 

 

유일사상체계를 지도체계로 채택

유일사상체계는 수령의 혁명사상만이 유일적으로 지배하게 하고 수령의 유일한 영도 밑에 전당이 하나와 같이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수령의 사상체계이자 영도체계입니다. 조선노동당은 1967년 유일사상체계를 지도체계로 채택하였습니다. 이로써 맑스-레닌주의와는 사실상 결별하면서 오로지 김일성이 제창한 주체사상만이 당과 사회 전반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공표하였습니다.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사상의지만 허용하는 유일사상체계가 지도체계로 채택되면서 북한 사회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 및 신념의 자유가 더욱 제한되는 폐쇄적이고 일원적인 사회가 됩니다

1968

푸에블로호납치와 승조원에 대한 구타, 약탈 발생

1968123,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됩니다. 함장 중령을 비롯한 6명의 해군 장교와 수병 75, 민간인 2명을 포함한 총 83명이 원산으로 끌려갑니다. 피랍 과정에서 미 해군 승조원이었던 듀엔 호지스가 총에 맞아 사망하고, 푸에블로호의 함장 로이드 부커 중령 등 82명의 승조원은 구금되었습니다. 구금되었던 이들은 19681223일 석방되기까지 구타와 고문 등 11개월 간 비인간적인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실제 푸에블로호 승조원의 석방과 본국 송환이 마무리 된 이후인 19693, 원산을 방문한 주 북한 소련대사관 외교관 카푸스틴은 기밀문건을 통해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한 사정을 본국에 전했습니다. 문건은 당시 소련 국적의 타티야나 리의 말을 인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구타 자국이 있었고, 하선 과정에서 약탈을 당했다” “포로들이 차고 있던 시계를 떼 내갔고 주머니를 뒤졌고, 하선 과정에서 항의한 일부 승조원을 무리의 눈앞에서 때렸다고 피랍 당시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증언은 승조원의 하선 과정이 현지 주민들에게 공개됐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하선 과정을 지켜보던 북한 노인이 포로 호송병 중 하나가 눈가리개를 쓴 미군 포로의 머리에 담뱃불을 비벼 끄는 등의 행위에 반발을 할 정도로 승조원을 향한 구타와 약탈이 상당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1969

 

수령제의 주창

북한 정치권력의 내홍이 일단락되고 김일성의 1인지배체제가 공고화된 시점인 19694, 전국 사회과학자 토론회에서는 수령에 대한 정의가 공표됩니다. 수령을 당과 정권기관, 근로단체들을 유일적으로 지도하는 최고 뇌수로 정의하였는데, 한 사람의 뜻 아래 모든 인민의 삶이 결정되는 독재의 논리가 주민들에게 일반화되기 시작합니다.

 

1972

사회주의 헌법의 채택

1972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됩니다. 사회주의 헌법은 주석제를 도입하여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였으며,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명문화합니다

1973

국가정치보위부의 설치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 보위규율기관인 국가정치보위부가 사회안전성 내의 비밀사찰기관에서 정치보위부로 분리되며, 공식 독립부처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출범합니다. 이 시기는 김정일의 후계구도가 가시화되던 때로, 국가정치보위부는 김정일 체제를 옹위하고 체제의 확립과 유지에 저해되는 모든 장애요소들을 적발 색출 제거하는 것을 기본임무로 운영됩니다.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은 더욱 더 강력하게 제한됩니다

1974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 발표

19744월 김정일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을 발표합니다. 10대 원칙의 발표 이후로, 이는 북한주민들을 일상적으로 규율하는 최고의 규범이 됩니다. 유일사상체계는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의 사상만을 알고 그 사상과 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유일사상체계 10대 원칙이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지침이 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은 더욱 더 침해됩니다.

 

 

 

 

북한 형법 개정

1974년 북한이 형법을 개정합니다. 소련의 형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1950년 제정 형법은 1974반 혁명범죄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과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방향으로 개정됩니다. 많은 반 혁명범죄에 대해 사형 및 전재산 몰수의 형이 부과되었습니다, 1974년의 형법은 북한 형법사 중 가장 극단적인 체제방위형법의 모습을 띈 것이라 평가됩니다.

 

1976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발생

19768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명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 중이던 UN 소속 주한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합니다. 당시 UN군 경비중대장 조지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를 포함한 6, 한국군 장교 1명을 포함한 5명은 공동경비구역 내 UN측 제5관측소와 제3초소 사이에 있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의 박철 중위가 현장에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작업 중단을 요구하며 폭행을 가했습니다. 폭행 중 북한군 병사가 버려져 있던 도끼로 보니파스 대위를 살해했고, 배랫 중위도 폭행 중 살해당했습니다. 다음날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를 요구했으나 북한 측은 사건을 덮으려고만 하였고, 대한민국 국군은 준전시체제에 돌입합니다.

이후 폴버니언 작전’, 미루나무를 벌목하는 작전이 시작됩니다. 나무를 자르는 작전이었으나 공대지 핵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전투기 20대가 전진배치됐고, 항공모함 등의 6천의 함선이 서해안에서 대기하였습니다. 한국 특수부대도 결사대를 꾸려 미루나무를 자르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합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무력시위이자, 북한의 추가 도발 시 서해안과 개성 등의 영토 수복을 고려한 작전이었습니다.

1977

북한, 납치 활동 시작

북한의 요원이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서 배우 윤정희와 그의 남편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납치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납치는 한국인 대상 뿐 아니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도 진행됩니다. 1977년부터 1983년까지 17명의 일본인이 실종됐습니다. 북한의 외국인 납치는 주로 간첩과 테러 활동 등을 위해 진행되었습니다. 17명 외에도 다른 몇몇의 실종 사건들 또한 북한의 납치 활동의 일환으로 의심되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 확인해주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쿠메 유타카가 가장 먼저 실종되었는데, 그는 이시카와현 해안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습니다. 추후 그의 실종 사건은 실종이 아닌 납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978

영화배우 최은희. 영화감독 신상옥 납북

1978114, 영화배우 최은희 씨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던 안양예술학교의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홍콩을 방문했다가 바닷가에서 납치를 당합니다. 홍콩에서 배를 타고 8일 만에 북한 남포항에 도착하였고, 그를 당시 후계자였던 김정일이 맞이합니다. 이후 최은희 씨의 전 남편인 영화감독 신상옥 씨도 19787월 홍콩에서 납북되는데, 두 사람의 납북은 북한의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야망이 있었던 김정일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최은희 씨는 당시 노동당 선전선동비서였던 김정일의 지원을 받아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냈으나, 신상옥 씨는 대부분을 수용소에서 보내며 탈출도 3번 시도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후 1983년 두 사람은 북한에서 재회하여 함께 영화작업을 시작합니다. 남한에서는 두 사람을 행방불명으로 파악하고 있다가, 1984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두 사람이 금강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납북이 공식화됩니다

1980

김정일, 후계자로 공식 지명

19801020일 북한 당국은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임을 대내외에 공식 천명하였습니다.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김정일은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날 이후 후계작업은 공개적이고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1981년부터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습니다. 김정일은 후계기반을 다지기 위해 삼촌인 김영주, 계모 김성애 등과 연결된 인물을 모두 추방하는 등 숙청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1980

주민증 검열사업 진행

김정일의 지시로 19801년간 주민증 검열사업이 진행됩니다. 공민증의 대조 및 갱신으로 불순분자를 색출하고, 주민의 감시자료를 더욱 체계화 합니다.

 

외국귀화인 및 월북자 등에 대한 요해 사업

19804월부터 6개월여 간 월북자 등 외부에서 입북한 자들을 13계층으로 구분하여 계층화하는 자료를 체계화하였습니다. 이렇듯 북한 주민에 대한 요해사업은 주기적으로 이뤄졌으며, 북한 주민은 항상 요해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81

북한, ICCPR(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가입

1981914일 북한은 ICCPR(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가입합니다. ICCPR은 일반적으로 자유권 또는 자유권적 기본권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 규약에 가입한 국가는 그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모든 개인에 대해 이 규약에 정해져 있는 제 권리를 존중, 보장할 책임을 가지며 즉시 이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명의 존중, 고문, 비인도적 처우와 형벌의 금지(7), 노예, 강제 노동의 금지(8), 자의적 강제구금의 금지(9) 등이 이 권리에 해당합니다. 북한은 ICCPR에 가입했으나 해당 권리들을 인민들에게 보장하지 않았으며, 1997년 유엔 인권소위원회에서 북한인권 상황에 대한 결의를 최초로 채택하자 ICCPR 탈퇴를 통보합니다. 유엔 사무총장은 ICCPR의 경우 당사국 전체의 동의가 없는 한 탈퇴를 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담은 답변서를 북한 정부에 보냅니다.

 

1982

이한영 탈북

1982년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이 스위스에서 탈북합니다. 이한영은 북한 내에서 최고 특권층에 속한 인물로, 1961년 평양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유학생 1기로 선발됩니다. 그는 모스크바종합대에서 유힉한 후, 프랑스어 연수를 위해 스위스로 갔다가 스위스 한국공관을 통해 탈북합니다

1987

대한항공 858편 폭발

198711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에 의하여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폭파 됩니다. 해당 비행편은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기착한 후, 다시 태국 방콕에 기하기 위해 비행하던 중이었으며 해당 기내에는 중동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근로자 90여명 및 승무원 등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의 조사과정에서 하치야 신이치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 가명을 쓴 북한 공작원에 의해 KAL 858기가 폭파된 것으로 드러났고, ‘마유미로 위장한 김현희는 기내에 두고 내린 라디오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로 폭파하였다고 자백하였습니다. 19882월 이 사건 토의를 위하여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으며 많은 국가들이 북한의 테러행위를 규탄합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불이익을 자초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1989

한국 대학생 임수경, 방북

19897, 평양에서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이 개최됩니다. 당시 한국외대 불어과 4학년이었던 임수경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선발되어, 독일을 거쳐 북한에 입국합니다. 임수경은 축전에 참여하여 북한 인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북한은 그를 북한을 존경하고 부러워한 남한 청년의 대표자로 선전합니다. 임수경은 같은 해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귀환합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에게 임수경 학생을 체포하고 그에게 박해를 가한다면 북남관계는 악화될 것” “임수경 본인의 희망대로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것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으나, 임수경은 815일 입국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징역 5,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92년 특별 가석방됩니다.

 

1991

공산권의 붕괴

1989년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하나씩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1985년 소련에서 구조 개혁, 즉 페레스트로이카 선언과 그 후 잇따른 개혁 조치의 실패입니다. 연방 내 공화국 사이에서 모순과 대립이 발생하였고, 결국 1991824일 소련공산당의 해체와 128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이 해체됩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진영의 몰락과 뒤따른 탈냉전의 도래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공산권의 붕괴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의존해왔던 사회주의 국제시장을 소멸시켜, 취약한 북한 경제를 더욱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더불어 소련 및 중국이 남한과 수교를 맺은 사건은 북한 외교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특히 19909월에 이루어진 한소수교는 북한 외교 노선의 근본적인 수정을 강요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1992

정치범 수용소 생존자 강철환귀순

함경남도 요덕군 요덕수용소에서 10년간 생활했던 강철환 씨가 한국으로 귀순합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조총련 교토본부 상공회장을 지낸 할아버지와 조총련 교토본부 여맹위원장을 지낸 할머니의 장손으로 유복하게 자라다, 알 수 없는 죄명으로 할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면서 온 가족과 함께 요덕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강제노동을 당하다 사회에 복귀했으나, 항상 뒤따르는 감시와 정신적 압박감을 피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귀순합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요덕 정치범 수용소가 조선인민경비대 2915군부대 일명 15호 관리소라는 위장 명칭 아래, 5만 명 넘는 사람들이 수용돼 있으며 해마다 15명 정도가 공개총살 됐다고 증언하였습니다.  

1993

승호리 정치범수용소공개

국제 엠네스티가 북한 내 정치범수용소를 국제사회에 공개합니다. 평양시내에서 동쪽으로 70떨어진 승호리에 북한 최고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으며, 최소한 49명의 정치범이 30년 이상 전기나 난방시설도 없는 골방에서 살고 있음이 공개되었습니다. 1992년 탈북한 강철환 씨에 따르면 승호리 정치범수용소는 주로 중죄인이나 고위층이 주로 수용되며, 한 달에 최고 3백 명이 굶어죽거나 처형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앰네스티의 발표로 정치범수용소가 북한 전역에 12곳 이상 산재돼 있으며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수용돼 있음이 국제사회에 알려졌고, 북한 수용소에 구금된 사람들의 인권 문제 및 귀환 문제가 대두됩니다

1994

김일성 사망과 김정일의 집권

199478일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합니다. 당시 한국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20여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사망 직후 김씨 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시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방부처리한 뒤 금수산태양궁전에 박제되었고,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주석직을 영구 결번 시켰습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주민들은 김일성의 기일을 국가 추모의 날로 기리며 사상학습 진행 또는 추모행사에의 동원 등을 강요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더불어 김일성의 사망으로 후계자인 김정일이 권력을 이어받아, 북한의 전체주의식 1인 지배체제 통치가 이어지게 됩니다

1995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부족 사태 발생

19957월 북한은 대홍수를 맞이합니다. 당시 북한 기상청은 10일 동안 약 600의 비가 내렸다고 보고하였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하루 동안 450가 내린 것으로 UN은 파악합니다. 1995년 초가을 북한은 홍수로 인하여 농업생산이 황폐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부족 사태를 겪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6년에는 심각한 가뭄이 이어져, 북한의 식량상황은 역사적 최악의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북한은 자연재해 이전부터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던 식량지원이 급감하여 상당한 식량난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1995~1998년 사이에 22만 명 정도가 아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국제사회는 이 시기 200~30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한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상당한 규모입니다. 북한의 사회안전부는 19975월 식량 절도에 대해 총살형에 처한다고 선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 시기에 식량위기로 인한 북한 내부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줍니다.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

연이은 북한의 자연재해로 식량위기가 심화하자 북한 당국은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19958월 말 북한은 사상 이례적으로 북한의 자연재해를 보고하며 UN5억 불의 홍수 구호자금과 연료, 의료품 지원을 요청합니다. 재난지역을 조사하려는 국제사회의 요구도 허용합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UN의 긴급지원 요청에 2백만 불을 지원하기로 결정합니다.

한국 김영삼 정부와 일본은 이에 앞서 19951월에 각각 15만톤, 50만톤의 식량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국내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으나, 한국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은 계속되었고 1997년도에는 적십자사를 통해 5만 톤의 쌀을 지원하였습니다.

 

 

배급제의 중단

북한은 19523월 내각결정 제56호로 국가식량배급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같은 해 5월부터 공식적으로 식량배급제를 실시해왔습니다. 북한은 출신성분에 따라 주민들을 핵심, 적대, 복잡계층 등으로 분류하고 이러한 계층분류에 따라 배급정책 및 사회보장 혜택을 차등적으로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1990년 이후 북한의 경제난이 악화되면서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고, 1995년 말에는 특정 계층을 제외하고는 배급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주민들의 끼니 마련은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1996

 

고난의 행군공표

북한 당국은 1996년 신년사를 통해 1990년대 계속되는 경제난과 식량 부족 등을 극복하고 주민들의 사회적 이탈을 막기 위해 고난의 행군이란 당적 구호를 제시합니다. 북한 당국은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면서 주민들에게 희생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산업이 붕괴되고 배급제가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장마당에서 활동하며 생활을 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집단주의 의식과 주체사상 등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다양한 비사회주의적 행위가 주민들 사이에서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스웨덴 주재 북한대사관, ‘담배 밀수 사건

19967월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관의 김홍림 대사, 한창엽 참사 등 외교관 대부분을 추방합니다. 이는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대사관 자체의 생존을 유지하라는 북한 당국의 압력 아래, 스웨덴 대사관이 진행해 온 담배밀수 사업이 현장에서 발각된 탓이었습니다.

김홍림 대사는 담뱃값이 비싼 스웨덴의 실정에 착안해 발트해 주변 국가(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에서 싼 담배를 밀수해 스웨덴 밀수조직에 넘겨 수만 달러를 벌어왔습니다. 그는 그 돈을 대사관 건물 보수 및 외교관 생활비로 사용해왔으며, 북한 외무성은 전 세계 대표부에 스웨덴 대표부의 자력갱생 정신을 따라 배우라고 치하 전보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사실상 북한 당국이 앞서 불법을 종용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습니다.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관은 담배 밀수를 계속 진행하다가 에스토니아 현지에서 서기관, 변신원 등이 체포되면서 밀수 행위가 전 세계에 공개됩니다

1997

이한영 암살

1982년 한국에 입국한 이한영이 19972월 거주하던 경기도 분당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합니다. 한국에 입국한 후 이한영은 성형수술을 하고 신분을 감추며 살다가, 1996년부터 TV 인터뷰와 김정일 로얄패밀리와 같은 저서로 북한 체제를 비판하였고 결국 북한 측 괴한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노동당 비서 황장엽, 한국으로 망명

19972월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는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11년간 역임한 당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김덕홍 노동당 부실장은 1997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중국 베이징에서 전격적으로 한국으로 망명하였으며, ‘한국으로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동포와 힘을 합쳐 김정일을 제거하는 것이 기아와 빈곤, 극심한 인권 유린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구원하는 길이라 믿었다고 망명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가 한국으로 망명한 후 그의 아내는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세 딸과 아들, 그리고 동료와 제자들은 숙청당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숙청의 바람, ‘심화조 사건

1997년 북한 고위급 인사 25천여 명이 처형, 유배된 심화조 사건(특별주민료해심화조)’이 발생합니다. 심화조 사건은 1994년 김일성의 사망 이후 구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 연이은 자연재해와 경제파탄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김정일이 주민 불만을 외부세력에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권력층과 일반주민에 이르기까지 전 주민의 출신과 경력에 대한 조사를 심화시켜 나가라는 지시 아래, 사회안전성에는 심화조가 구성되었고 평양과 지방의 안전원 8천여명이 3년 동안 심화조 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안전원들은 주민들의 경력을 재조사하였고 사상에 의심이 있거나, 이력에 조금이라도 공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심층 심문을 했습니다. 심화조 사건으로 서관히 노동당 농업담당비서는 식량난을 일으킨 간첩으로 몰려 평양 시내에서 공개 총살당했고, 장성택의 정적이었던 문성술 노동당 본부당 책임비서 역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망했습니다. 4년 동안의 심화조 사건으로 1만 여명이 사망하였고, 15천여 명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해외 노동자 임일, 쿠웨이트에서 탈북

1997326일 쿠웨이트 대외건설 파견단의 일원으로 쿠웨이트에 파견된 임일 씨가 쿠웨이트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합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대외경제위원회에 근무하다가 쿠웨이트로 파견돼 건설 근로자로 일하던 임일 씨는 5개월여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 건설현장에서 노동했으나 단 한 번도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임일 씨에 따르면 1995년부터 쿠웨이트로 노동 인력이 송출되었으며, 그가 머물렀던 당시 18백 여명의 노동자가 사막의 뙤약볕 아래 건설노동자로 일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임일 씨는 인권 유린과 임금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결심했고, 쿠웨이트 주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망명하여 한국으로 입국합니다.  

1998

세계 10대 극빈국 수준’, 북한 어린이 영양상태 조사결과 발표

1998년 가을 EU, UNICEF, 그리고 WFP는 북한 당국과 공동으로 북한 어린이의 영양 상태를 전국적인 규모로 조사하여 그 결과를 보고서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7세 이하의 북한 어린이 가운데 키에 비해 몸무게가 적은 급성영양실조 어린이가 15.6%, 나이에 비해 키가 작은 만성영양실조 어린이가 62.3%에 달하였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 영양상태와 비교해 볼 때 북한 어린이는 급성과 만성 영양실조율 모두 매우 높은 수준으로 확인됩니다. 급성영양실조율 15.6%라는 수치로만 보면 북한은 세계 10대 극빈국 수준이었습니다.

 

 

 

2000

-러 평양선언으로 해외파견 노동자 수 증대

2000년 7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통해 발표된 평양 선언을 통해 러시아로의 북한 노동력 파견이 활발해지게 됩니다러시아로의 북한 노동자 파견은 1940년대부터 진행이 되었는데 1950년까지는 어업 부문에, 1967~1991년까지는 벌목 분야에 집중되어 왔습니다평양선언을 통해 극동 지역에서의 북한 노동력 사용에 대한 합의가 구체화되면서북한 노동자들은 농업임업건설업광업 분야를 통틀어 활발하게 러시아로 이동하게 됩니다그리고 북러 양국 정상의 만남이 계속 이어지면서북한 노동자의 수와 분포지역은 점차 더 확대 되었습니다러시아로 이동한 북한 노동자들은 러시아 현지인과는 대조되는 좋지 않은 노동 환경에서 적은 보수만을 받고 노동하였으며이 보수마저 국가에게 빼앗기는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사례를 빈번하게 겪었습니다더불어 해외에서의 탈북 가능성으로 인해 감시 받고서로를 감시하는 기본적 침해도 당하였습니다.

 

 

 

 

 

심화조 사건주동자들, 숙청

심화조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군 보위사령부를 동원해 심화조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던 채문덕 당시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을 혁명대오 안에 끼어든 불순 이색분자로 몰아 숙청합니다. 나머지 심화조 단원들도 전격 체포되었고, 전국의 안전부에서 심화조로 파견 나왔던 안전원 6천여 명도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총살당하거나 교화소로 보내졌습니다. 또한 연좌제로 인해 이들과 연관된 사람들도 숙청되었습니다.

심화조 사건 종결 이후 김정일은 2001년 사회안전부 명칭을 인민보안성으로 바꾸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등 악화된 민심을 다독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25천여 명의 피해자 중에 죽거나 자살한 사람이 40%에 달할 만큼 잔혹했던 숙청 바람에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평양 4.25 문화회관에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진행됐으나, 김정일의 의도와 달리 위로연이 김정일을 고발하는 성토장이 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김남수, 재입북

1996년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탈북한 김남수 씨가 국내 정착 후 4년 만에 다시 월북합니다. 김남수 씨는 중국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가서 귀국 요청을 하며 30만 달러를 당에 기부하였으며, 북한 당국은 그를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합니다. 김남수 씨는 공장이나 인민반에서 고달픈 남조선사회의 체험담을 주제로 순회 강연을 하였고, 김정일은 그를 함경북도 온성군에 있는 은덕원(목욕탕, 이발소)’ 지배인으로 복귀시켰습니다. 그러나 감시와 통제가 계속 이어지고, 은덕원에서도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취급을 당하자 2001년 아들과 여성 이발사와 함께 다시 탈북합니다.

 

 

2001

장길수 가족, UN 판무관실 진입

2001626, 중국에 은신해 지내던 16세 장길수 군 등 탈북 가족 7명이 중국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실에 진입합니다. 장길수 군의 가족은 수년 동안 이어진 식량난으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죽음을 목도한 후, 19991월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밀입국합니다. 함께 도강한 16명 중 5명이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북송되었고, 이 중 장길수의 어머니를 포함한 2명은 반국가활동죄로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이후 장길수 군을 포함한 7명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중국 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로 들어가 북한으로 송환될 경우 자결하겠다며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합니다. 중국 당국은 이들을 제3국으로 이송하기로 하였고 이들은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되었고, 이들 가족은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2002

재중 스페인 대사관에 탈북민 진입

2002314, 중국에 머물던 25명의 탈북민들이 스페인 대사관으로 들어갑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2001년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되어 혹독한 시련을 겪다가, 다시 탈북하여 중국 내 피신해 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들은 난민 지위의 부여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하며, “수동적으로 우리 운명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생명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행을 피할 만큼, 북한 내 인권 상황이 열악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국 당국은 강제추방 형식으로 이들을 필리핀 마닐라 아키노 공항으로 보냈으며, 필리핀에서 사흘 밤을 보낸 뒤 한국으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들의 한국행 성공은 20016월에 있었던 장길수 가족의 유엔사무소 진입과 더불어 탈북민의 기획망명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정일, ‘납북인정

2002917, 평양 백화원에서 1차 북일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이 정상회담에서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북한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표명했고,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일본 정부가 생존 확인을 요구한 정부 인정 피해자 13명에 대해 요코다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생존해 있으며, 1명은 북한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이후 1015일 북한은 정상회담 때 생존을 확인해준 5명을 일본에 일시 귀국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납치 피해자 중 1명의 유골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북일 간 갈등이 고조됩니다. 이에 일시 귀국한 피해자들은 일본에 머물게 되고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흐지부지한 상태로 끝이 나게 됩니다. 북한 당국은 지금까지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다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2003

 

인민보안성, 주민 신분 현황 전산화 시작

200312월부터 북한 당국은 인민보안성의 주관 하에 주민들의 신분 현황을 전산화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2000년 이후 탈북자가 잇따르면서 주민들의 관리를 강화할 필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북한 당국이 활용한 신분등록 전산화 프로그램 충복(충실한 종) 2.0’은 한국의 주민등록 시스템과 같이 성별 및 연령 구분, 출생과 사망, 세대별 거주자, 관내 이동 및 퇴거 여부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지역별 전체 인구수 등 각종 통계치도 기록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더불어 주민 정치사업 참가인원 수를 매월 집계하고 관련 법규 위반자 처벌 유형을 노동단련’ ‘이주 및 추방’ ‘벌금 및 그 액수등으로 세분화 하여 기록하는 등 주민들의 동향을 더욱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렇듯 전산화 과정에 주민들의 정치적 동향을 파악하는 항목이 추가되는 것은 전산화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4

 

탈북민 44베이징 캐나다 대사관 진입

 

2004년 9월 29일 미성년자 7명을 포함한 탈북민 44명이 중국 베이징 캐나다 대사관에 진입합니다진입 과정에서 공안에 체포된 1명을 제외한 43명은 대사관 진입에 성공하여 한국행을 요구하였습니다남자 17여자 26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거나 탈북 후 재송환되어 수용소에서 고문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 등 북한 당국으로부터 인권유린을 당한 사례가 다수였습니다.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와 이동통신 서비스 중단

2004422일 북한 룡천역(용천역)에서 열차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150명의 사망자와 1,3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합니다. 사고는 질안비료를 적재한 화물차량과 유조차량이 궤도를 교체하던 중 전기선에 접촉하여 발생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로 인하여 1,850세대가 거주하는 건물 30여 동이 완파되었고, 주택 8,100여 세대가 파괴되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례적으로 사고 발생 사실과 원인, 그 규모를 신속히 발표하고 국제사회에 구호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한국에서는 곧바로 정부 차원의 의료품 및 구호물품을 지원하고, 민간단체 역시 성금과 구호물자를 전달하였습니다.

한편 사고 발생 시점이 김정일이 열차를 타고 중국에서 돌아오던 때라는 점에서, 김정일은 룡천역 폭발사건을 자신에 대한 암살시도로 믿었다고 합니다. 이에 북한 당국은 폭발 사고 이후, 북한 전역에 휴대전화 서비스를 4년간 중단하였고, 다시 이동통신 서비스를 재개하면서 고위층 및 주민에 대한 도청 등이 가능하도록 통신망을 구축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탈북민 486명 한국 입국

2004727, 28일 베트남에 머무르고 있던 탈북자 468명이 1,2진으로 나누어 한국에 입국합니다. 이들은 80-90%는 함경도 출신으로, 70% 이상이 여성이며 20%은 어린이였습니다. 이들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당국의 통제를 덜 받는 덕에 식량난과 생계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탈북민이 대거 한국으로 입국하면서 북한 당국은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 등 남북대화를 전면 중단하였고, 내부적으로는 주민 단속을 대폭 강화합니다. 더불어 베트남을 향한 강한 북한의 항의로 탈북민의 한국 입국을 도왔던 한국인 6명의 현지 사업체가 몰수되었으며 그들은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또한 중국이 탈북자 단속을 강화한 뒤 유력한 탈북루트로 활용되어 온 베트남 루트가 차단되었습니다.

 

 

 

 

 

북한 형법 개정

2004429일 북한의 형법이 대폭 개정되었습니다. 2004년 개정을 통해 기존 161개조였던 조문이 303조로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습니다. 조문의 확대는 기존 유추규정이 사라지고 각 조항마다 제목을 붙여 그 의미를 분명히 한 것에 따른 것으로, 이는 그간 유추규정으로 권력에 의한 형법의 자의적 활용과 남용가능성이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형벌분야에 무기로동교화형이 추가되었고, 경미한 범죄에 대하여 로동단련형이 추가되는 등 형벌에 대한 세부적 분류가 이루어졌습니다. 2004년 형법 개정은 국제적인 인권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북한 당국 역시 우리식 인권기준을 내세우는 대신 유엔인권규약에 요구하는 바를 따르는 방침이었다고 밝혔습니다.

 

2007

형법부칙(일반범죄)’ 신설하여 형벌 강화

2007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기존의 형법 조항에 새로운 범죄를 추가하는 형법부칙을 신설합니다. 이를 통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형법부칙(일반범죄) 16개 조문에서 최고 사형부과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었는데, 구체적으로 귀금속 밀수, 밀매죄나 국가재산 고의적파손죄 등의 경제범죄도 사형 부과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만약 범죄자가 여러 가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갱생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될 경우에도 사형이 가능하다는 포괄적인 조항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국제인권규약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정을 이뤘다는 2004년 형법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북한 주민에 대한 생명권 침해가 더욱 심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8

박왕자 씨, 금강산 관광 도중 피살

2008711일 금강산 관광을 간 박왕자 씨가 새벽 시간 해안가를 산책하다가 북한군 해안초소에서 발사된 총탄을 맞아 사망합니다. 북한은 당시 그가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왔고, 북한군의 정지 요구에 불응하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밝힙니다. 한국 정부는 민간인 관광객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며 북한에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 약속, 신변 안전보장의 ‘3대 선결 요건을 제시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합니다. 이후 금강산 관광의 길은 막혀 2021년 현재까지 재개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2009

미국 언론인 2, 북한 억류

20093월 중국과 북한 국경 인근에서 취재 중이던 미국 커런트 TV 소속의 기자 유나 리, 로라 링 씨가 국경침범 혐의로 북한군에 체포돼 북한에 억류됩니다. 미국은 여러 가지 외교채널을 통해 기자들의 석방을 촉구하였고 국경없는기자회(RSF)와 국제 언론인협회(IPI), 국제앰네스티 등 관련 단체들도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북한 당국은 두 기자를 재판에 부쳐 조선민족적대죄, 비법국경출입죄를 적용해 12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합니다. 미국의 물밑 접촉으로 두 기자는 억류된 지 5개월 만인 9월 석방됩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두 기자를 태우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귀국하였습니다.

 

 

 

화폐개혁 단행

20091130일부텨 126일까지 화폐개혁이 진행됩니다. 이 화폐개혁 조치는 2002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화폐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고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자금을 끌어내고, 계획경제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리고 짧은 기간을 한정해 진행된 화폐개혁은 오히려 북한 경제를 심각한 혼란에 빠뜨립니다. 북한 주민들은 북한 화폐를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원화는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화폐기능을 현저히 잃게 됩니다. 주민들은 이후 장마당, 종합시장에서 원화보다는 위안화, 달러화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화폐개혁 이후 경제혼란으로 북한 전역에는 꽃제비와 아사자들이 급증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2010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사망

20101010,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사망합니다. “(만약 내가 결단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역사는, 그때 북에서는 그렇게도 엄청난 폭력과 불합리 속에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당당하게 나서서 비판하거나 저항한 지식인이 단 한명도 없었다고 말할 것이라며 민족적 양심에 따라 탈북 했음을 회고록을 통해 밝힌 그는, 한국에서의 삶을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리고 북한의 민주화와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한 투쟁에 바쳤습니다. 그는 주체사상의 설계자였으나, 망명 후 공개적으로 북한을 비난해왔기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수많은 살해기도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13년 만에 거주하던 안전 가옥의 욕조에서 심장이 멈춘 채 발견되었습니다.

 

 

 

천안함 피격

2010326일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경계 작전을 수행하던 해군 제2함대 소속의 천안함이 북한 어뢰 공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은 고성능 폭약 250kg을 넣은 길이 7.35m의 어뢰를 천안함 공격에 사용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북한의 비인간적인 무력 도발로 인해 승조원 104명 중 58명이 구조되었지만, 46명은 전사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천암함 피격 사건에 대해 국제 사회는 북한은 비난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고, 북한이 이번 공격에 책임이 있고 이는 국제 평화와 안보에 대한 도전이며 정전협정 위반에 해당한다며 북한을 규탄하였습니다.

 

 

 

꽃제비 여성사망

20108KBS 뉴스에 소개되었던 북한의 20대 꽃제비 여성이 10월 사망하였습니다. 20106월 아시아프레스를 통해 전해진 이 여성은 당시 23세였지만 굶주림으로 앙상하게 되어 10대 소녀로 보였으며, 자신이 먹기 위해 토끼풀을 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여성을 촬영한 아시아프레스 관계자는 이 여인이 1020일 경 옥수수 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으며, 시신이 발견됐을 때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으나 주민 신고를 받은 해당 인민보안소가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늦장대응을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시신이 옥수수 밭에 방치됐다는 주민 증언을 전했습니다. 꽃제비 여성의 사망은 2009년 화폐개혁 조치 이후, 북한 주민들이 직면하게 된 식량난과 열악한 인권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북한, 연평도 포격 도발

20101123, 북한이 한국 영토인 연평도에 대한 포격 도발을 합니다. 북한 군은 연평도 내 군부대뿐만 아니라 민가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170여 발의 포격을 자행했고, 이 포격도발로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또한 건물도 133동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습니다.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은 한국전쟁 이래 한국 영토에 대한 북한의 첫 번째 공격이라는 점,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의 비인도적인 포사격 행위에 세계 각국은 분노하고 이를 규탄하였습니다

 

 

2011

김정일 사망

20111217, 김정일이 중증급성심근경색, 심장성 쇼크 합병으로 사망합니다. 1219일 조선중앙TV는 김정일 사망 후 51시간 만에 김정일이 17일 오전 현지지도를 하다가 갑자기 사망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북한은 사망 발표 이후 김정일의 시신을 공개하였고, 김정은이 조문객을 받는 모습을 통해 북한이 이제 김정은의 시대에 진입했음을 공표하였습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사망하기 1년 전인 20109월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오르며 후계자라는 사실을 대내외에 알린 바 있는데, 김정일의 사망은 역설적이게도 1년 동안 김정은으로의 세대 이동이 안정적으로 진행됐음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의 부상으로 북한은 김씨 3대가 권력을 주고받는 세습왕조 체제를 이어갑니다

 

 

 

북한 주민 21목선으로 남하

2011년 10월 30일 북한 주민 21명을 태운 5톤급 목선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하하다 해군 함정에 발견됩니다이들은 한국으로의 망명 의사를 밝혔습니다이들에 앞서 2011년 6월과 9월에 목선을 탄 북한 주민들이 각각 백령도 인근 해상과 일본 해안으로 넘어 왔습니다그간 배를 구하는 것이 어렵고또 표류할 경우 장기 조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에서 해상 탈북 사례는 많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중국 국경 경비가 강화된 이후 뗏목이나 목선 등 열악한 장비에 의지해 목숨을 건 채 한국행을 시도하는 주민들이 증가하였고이에 북한은 어선 등 바다로 나가는 일체의 시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2012

케네스 배 미 선교사, 북한 구금

201211, 미국 국적의 케네스 배 선교사가 북한에 구금됩니다. 그는 관광객들을 인솔하여 북한을 방문하였다가 외장하드에 담긴 체제 비판 콘텐츠로 인해 체포되었으며, 이후 국가전복음모죄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배 선교사는 자신의 기소장에 예배와 기도로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내용이 기입되어 있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외국인 특별 교화소에서 노역한 그는 하루에 중노동을 10여 시간 했으나 음식은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였고, 이에 수감 기간 2년 동안 병원과 교화소를 세 차례 오간 것으로 알려집니다. 미국은 제임스 클래퍼 당시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방북하게 하여, 2014119735일 만에 그를 구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외국인, 특히 미국인을 인질로 삼고 그를 통해 외교적 이득을 보려고 하는 북한의 인질 외교전략을 보여줌은 물론,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는 등의 행위가 국가 전복의 목적으로 해석되는 등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제한되는 북한 사회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수령의 초상화를 지킨 여학생 일화 대대적 우상화

201211월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한 중학생이 폭우 속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구하다 숨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인풍중학교 4학년의 한현경 학생은 11일 새벽 폭우로 인해 집이 붕괴되려 하자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건져내려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 학생을 대대적으로 영웅화합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학생의 부모와 학교청년동맹일군, 교원들을 표창하였고, 이를 방송을 통해 보도하였습니다. 종이에 불과한 사진을 자신의 목숨보다 우선한 이 사례는 북한 당국이 주민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사상 교육이 얼마나 강력한지, 또한 그 교육이 개인의 사고와 생각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013

 

장성택 처형

20131212일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판결받고 곧바로 처형됩니다. 장성택은 당시 북의 제2인자로 통했던 인물로, 그는 128일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반당반혁명종파행위자로 낙인찍혀 체포된 지 나흘 만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는 김정은의 공식 승계 2년 만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1213일 노동신문에 실린 판결문에 따르면 장성택은 공화국 헌법 60조에 따라 형 집행을 당하였는데, 이는 김일성 일가의 유일영도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항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불경죄’, 북한의 후계 세습에 반기를 들고 김정은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성택의 처형은 정치적 안정과 체제 유지를 위해 친족(고모부)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북한의 독재 정치 및 인권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직 미국 병사 메릴 뉴먼’, 체포와 추방

2013년 10월 26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전직 미국 병사 메릴 뉴먼이 일주일 간의 북한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려던 중 북한 당국에 체포됩니다뉴먼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활동한 반공 게릴라 부대인 구월산 유격대의 군사고문관을 지냈고북한 방문 당시 북한 가이드에게 한국전쟁 때 구월산에서 싸운 사람들이 살아 있는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는 발언을 한 것을 빌미로 반공화국 적대행위’ 혐의를 입어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체포 이후 북한 당국은 뉴먼에게 사죄문을 작성하게 하고 이를 카메라 앞에서 직접 읽도록 했으며, ‘구월산유격군 전우회’ 회원들의 주소와 이메일을 북한에 제출하도록 했습니다뉴먼은 미 국무부뉴먼의 가족들전직 미국 관료들의 두 달에 걸친 다각도의 노력 끝에 체포된 지 42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2014

미국인 제프리 파울, 성경책 유포 죄로 체포

2014429일 북한에 입국한 제프리 파울은 청진시를 여행하던 중 나이트 클럽에 성경을 놓고 나왔습니다. 이후 그는 성경책 유포 혐의57일 출국 과정에서 체포되었고 6개월 가량 북한에 억류됩니다. 그는 성경을 놓고 나오는 것이 북한 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제프리 파울의 체포는 자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도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북한 사회의 억압성을 보여줍니다.

 

 

미국 소니픽쳐스 해킹 사건

201411월 미국 소니픽처스가 김정은과 북한 상류층을 풍자한 미국 B급 코미디 영화 디 인터뷰개봉 후 해킹과 테러 위협을 받습니다. 북한 해커가 다른 국가의 발전소 등 기관시설을 공격한 적은 있었지만 민간 기업을 목표로 삼은 것은 소니 픽쳐스가 최초입니다. 이 해킹으로 소니 픽쳐스의 업무는 완전히 마비되고 각종 기밀 정보가 공개됩니다. 해킹이 발생하고 9개월 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와의 인터뷰에서 소니픽쳐스 회장은 해커들이 소니를 완전히 불태워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북한을 악당으로 설정하는 영화들이 사라지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는 할리우드 제작자 및 작가들의 두려움과 자기 검열 때문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소니픽쳐스 해킹 사건은 북한 정권을 자극하는 이들에게 개인적 또는 직업적 해악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를 할리우드에 가중시키는 등, 세계인의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흐름을 낳았습니다

2015

임현수 목사, 북한 억류

2015127일 북한의 요청으로 방북한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는 나선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됩니다. 그는 북한 선교의 큰 손으로 불리며 1997년부터 북한을 150여 차례 이상 드나들며 인도적 대북 지원에 힘써온 인물로 약 3000만 달러(340억 여원) 상당의 현금과 물품을 지원해왔습니다. 북한 당국은 그를 갑자기 억류하여, 12국가전복음모 혐의로 무기노동 교화형을 선고합니다. 임 목사는 평안북도 소재 외국인 특별 교화소 독방에 감금되었으며, 당시 50여명의 간수에게 지속적인 언어폭력을 계속 받은 것은 물론 하루 8시간 씩 강제노동을 당했습니다. 이후 그는 북한에 억류된 지 26개월여 후인 201789일 석방됩니다. 석방된 후 임 목사는 선교자, 탈북자를 포함해 국군포로와 납북어민 등 현재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 국적자가 수십여 명에 이를 것이라며 증언하였습니다. 실제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 국적 선교사 6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목함지뢰 폭발 사건

201584일 경기도 파주시 인근 DMZ 남측 지역에서 북한이 설치한 목함 지뢰가 폭발해 한국군 하사 2명의 다리가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특별조사팀이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는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불법으로 침법하여 목함지뢰를 의도적으로 매설한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이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에 이은 5년 만의 군사적 도발이었습니다. 남북 간의 수차례 회담 이후, 북한 당국은 DMZ 목함지뢰 도발 사건의 주체가 북한이라는 점과, 이에 대한 북한의 유감표명을 남북한 합의문서에 명기합니다.

한편 북한군의 지뢰 매설은 한국군을 대상으로도 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인민군 내부를 대상으로도 진행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내부 군인들이 한국으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으로, 이는 휴전선 인근에서 군인들이 자주 이탈하고 있으며 북한군의 전반적인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징후로 보여집니다

2016

오토 웜비어, 북한 당국에 체포 및 억류

201612, 미국 버지니아주의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북한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북한 당국에 체포됩니다. 북한 당국은 그를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순안공항에서 체포했고, 국가전복음모죄를 적용하여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그가 북한 어디에서 어떻게 수감 생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201762일이 되어서야 북한 유엔대표부는 미국 측에 웜비어가 혼수 상태라고 통보하였고,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의료진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613일 웜비어를 미국으로 데려 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망하였습니다. 건강하던 20대 청년이 북한에 장기간 억류되었다가 혼수상태로 풀려난 직후 사망한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미 정부의 대북인식과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20169월 북한 여행 금지 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듬해 미 의회에서는 강력한 대북제재 법안인 오토 웜비어 북핵 제재 및 강화법을 채택하였습니다.

 

 

 

한충렬 목사, 괴한에 의해 살해

2016430일 북중 국경지역에서 탈북민들을 20여 년 돕는 사역을 하던 한충렬 목사가 괴한에 의해 살해됩니다. 중국 조선족인 그는 1993년 북-중 국경지역인 중국 지린성 백산시 창바이 조선족자치현에 장백교회를 설립하고 어려움에 처한 탈북민들을 음식과 약품 등으로 도우며 북한 구호 및 선교활동을 벌여 왔습니다. 한 목사는 몸 여러 군데가 찔려 숨진 채 자신의 자동차에서 발견되었고, 중국 당국은 범인들이나 범행 동기에 관해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목사가 사망한 1년 후, 탈북한 한 북한 주민이 스스로 한 목사 살해 사건에 북한 국가보위성의 사주를 받아 가담했으며, 한 목사 피살 사건 이후에는 표창 및 선물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북한, 유엔 인권보고관 첫 초청

201653일 카탈리나 데반다스 아길라르 장애인 인권 특별보고관이 북한을 공식 방문합니다. 아길라르 특별보고관의 방북은 북한 당국의 초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이는 북한이 2016년 장애인 권리협약을 비준한 것에 따른 조치로 확인됩니다. UN 인권이사회가 지명한 특별보고관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아길라르 특별보고관의 방북이 처음입니다.

방북 중 아길라르 특별보고관은 평양과 황해남도 지역을 방문하였고, 방북 이후 북한이 장애여성을 강제로 낙태시키거나 임신할 수 없게 하고, 장애아동이 출생하면 때때로 영아 살해가 발생한다는 우려스러운 보고를 부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실제 일부 탈북자는 “1984년 양강도에 있는 장애인 전담 수용소에서 어린 장애아들과 성인 장애인들이 탄저균 등 각종 화학무기 실험 대상으로 희생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

 

2017

김정은 이복형 김정남’. 독성 화학물질 ‘VX’에 의해 사망

2017213, 김정일의 아들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맹독성 화학물질 ‘VX’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김정남이 암살된 지 일주일 후, 말레이시아 경찰은 사건 용의자 5명이 북한 국적자라며 북한 정권의 개입 의혹을 구체적으로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도주와 증거불충분에 의한 석방으로 처벌받지 않았고, 김정남의 얼굴에 직접 VX를 발라 사망에 이르게 한 인도네시아 국적 시티 아이샤와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 두 사람만 기소돼 수감됐습니다. 화학무기금지조약(CWC)에서 사용을 금지한 맹독성 물질 VX를 이용한 북한 정권의 행동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으며,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9년 만에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북한의 대외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말레이시아는 외교관 강철을 추방하고 북한과의 비자 면제협정 파기를 결정합니다. 또 말레이시아는 4월 평양에 있던 자국 대사관을 폐쇄합니다.

 

 

 

 

 

 

미국 CNN 방송, “미지의 국가: 북한 속으로방영

2017916, 미국 CNN 방송이 북한 곳곳을 둘러보며 일반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특별 탐사보도 다큐멘터리를 방송합니다. 윌 리플리 등 취재팀 3명은 2017년 여름 북한을 방문하여 15일 간 머물며 평양과 강원도 원산, DMZ와 백두산 등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였고, 북한 당국의 허용 아래 외국 기자와 대화가 허용되지 않았던 북한 주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취재팀이 만난 북한 주민들은 미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전혀 감추지 않았는데, 특히 전자오락을 즐기던 15세 무렵의 소년들은 총으로 적을 죽이는 게임을 가장 좋아하며, 적은 미국인이다라 말하며, “내가 미국인이면 나를 쏘겠느냐라 물은 리플리 기자에게 라고 응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당국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적대 교육 및 사상 교육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북한이 주민들의 사상의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군 병사 오청성,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넘어 귀순

20171113일 북한군 병사 오청성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군용차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돌진한 후 초소 인근에서 하차하여 남쪽으로 달려와 귀순합니다. 오청성 씨의 탈북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군은 JSA 내에서 총을 가진 채로 뛰어가는 것은 물론, 남쪽을 향하여 조준사격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행위였습니다.

북한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북한군으로부터 5발의 총상을 당하였으며, 한국군의 구출을 받아 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총격으로 내장 7군데가 파열되었으며, 출혈이 심해 사망 가능성이 높았으나 극적으로 회복하였습니다. 오청성 씨의 남하 과정은 전 세계가 주목하였고, 이동의 자유 및 거주이전의 자유를 억압하고 생명권을 침해하는 북한 당국의 비인간적 처사를 국제사회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2018

 

북한 억류 미국인 3명 석방

20185, 북한에 억류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김학송 선교사, 김동철 목사, 김상덕 교수가 석방되었습니다. 이들은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한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으며, 폼페이오 장관과 함께 510일 미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김학송 선교사는 북중 접경지대에서 태어난 조선족으로 199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인물로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근무하던 20175적대행위혐의로 평양역에서 체포됐습니다. 김상덕(토니 김) 교수는 평양과기대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하던 중 북한을 전복하려는 범죄행위 혐의로 체포됐으나 실제 범죄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김동철 목사는 한국태생의 미국 시민으로, 2015년 간첩 혐의로 북한에 억류되었으며 20161010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이 북한에 장기 구금돼 있는 동안 어떤 처우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외국인 수감자들의 기본적인 권리인 영사 접견을 전혀 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2018524일 북한 당국은 갱도를 폭파하는 방식으로 풍계리의 핵 실험장을 폐쇄합니다. 북한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1년 동안 풍계리 핵실험장의 1번 갱도에서 한 차례, 2번 갱도에서 다섯 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및 핵실험장 운영은 동북아시아에 전쟁 위기를 고조시킨다는 점뿐만 아니라, 국내 주민들의 건강 및 안전에도 지속적인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풍계리 핵실험장 주변에 거주하였던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20061차 핵실험 당시, 새들이 떨어져 죽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북의 방사능 안전 관리가 부실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지금도 일부 북한 주민들은 전쟁의 위기와 더불어, 방사능 피폭 위험의 그늘 아래 살고 있습니다.

2019

한국 정부, 북한 탈북 선원 2명 강제 송환

2019117일 한국 정부가 동해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에서 나포한 북한 주민 2명을 판문점을 통해 강제 북송합니다. 오징어잡이 북한 목선을 타고 있던 이들은 112일 동해상에서 한국 해군에 나포되었고, 배 안에서 선장의 가혹행위로 불만을 품고 선장을 포함한 16명의 동료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2명의 북한 선원은 자의로 귀순 의사를 명백히 밝혔으나 정부는 이들이 귀순보다는 도피 목적으로 남하했으며 귀순 의사에 진정성도 없다며 이들을 강제 북송하였습니다. 두 탈북 선원은 안대를 쓰고 재갈이 물린 채 판문점에 도착했으며, 북송 사실을 알지 못하였는지 북한군이 보이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헌법의 영토조항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정부는 이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탈북 선원을 강제 북송한 정부의 조치는 탈북 선원들의 기본적 인권은 물론이고, 국민을 보호할 헌법 상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더불어 사지와 다를 바 없는 북한으로 이들을 강제추방 한 것은 유엔 고문방지협약을 위반한 조치였습니다.

 

 

 

 

시신 7구 실은 목선 일본해에서 발견

20191227일 일본 북서부 사도섬 해안에서 백골 시신 7구를 실은 목선이 발견됩니다. 목선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겉면에는 한글이 적혀 있었고, 이를 확인하고 조사하던 일본 해안경비당국은 목선 내에 머리만 남은 시신 2구 등 백골 시신 7구를 발견하였습니다. 선원들은 대개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불어 이 시신들이 부분 백골화가 진행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아, 목선은 꽤 오랜 시간 바다를 떠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례는 어떻게든 북한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북자들의 시도 또는 북한 내 식량 부족 사태가 부실한 배를 끌고서라도 주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도록 했다고 추정하게 합니다

 

 

 

 

북한보편적 정례검토(UPR) 참여

북한은 2009년과 2014, 2019년 UN 인권이사회의 보편적 정례검토(UPR) 심의를 받습니다. UPR은 UN 인권이사회에서 UN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인권상황을 상호 검토하고이를 바탕으로 인권상황 개선 방안을 검토하는 제도로 2008년 도입되었습니다북한은 2014년 UPR에서 268개 인권개선 권고 중 113개 권고 사항에 대해 수용의사를 나타낸 바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인권논의에 참가하고 있는 북한 당국의 이러한 행보는 인권의 측면에서 진전된 것이라 평가됩니다그러나 국제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정치범 수용소 폐지북한판 신분제도(성분제폐지종교 서적 보유의 자유화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권의 방북 허가 등은 지속적으로 수용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북한인권의 증진에는 여전히 큰 제한이 있는 상황입니다.

 

 

2020

코로나-19와 국경 봉쇄

사상 초유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에 20201월 북한 당국이 국경을 닫아 걸었습니다. 128일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가 비상방역체계로 전환한다고 밝히며, “국경과 지상, 해상, 공중 등 모든 공간에서 코로나 비루스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선제적으로 완전 차단 봉쇄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국경 전면봉쇄 방침에 따라 북한은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교류도 중단하고, 131일부터는 중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기와 열차 운항도 중단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북한 주민의 삶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북중 무역 중단으로 소비재 수입이 중단돼 당장 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이동의 자유를 한 층 더 심화하여 제한하는 조치로 인해 이동 및 탈북이 크게 어려워졌습니다.

 

 

 

북한식 코로나 방역법, ‘총살

국경을 완전 봉쇄하는 등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강경 대응 행보를 보인 북한 당국이 방역 규율 위반을 이유로 주민들을 총살하는 사례가 발생합니다. 방역 규율 위반자로 처형된 첫 사례는 2월경으로 함경북도 나선시에서 발생하였는데, 중국에 다녀와 격리됐던 무역일꾼이 몰래 대중목욕탕에 간 사실이 적발되어 곧바로 총살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도 2명이 총살되었으며, 이들은 확진 판정을 받지도 않은 상황에서 방역 규정 위반자에게 군법을 적용하라는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국민의 건강 및 안전을 보장하는 국가의 기본 의무를 저버리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총살 조치를 방역 조치로 활용하는 북한 당국의 행보는 북한 주민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북한인권 수준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격 사건

2020922. 당직 근무 중 실종되었던 한국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측 해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21일 낮 서해 소연평도에서 실종된 이 공무원은 구명조끼를 입고 부유물에 올라탄 채 표류하다 22일 오후 북한 측 해역에서 북한 수상사업소 선박에 의해 최초 발견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날 밤 10시 경, 북한군의 총격에 의해 살해 당하고 40여 분 간 불태워지는 모습을 한국군이 확인 것으로 알려집니다. 비무장 상태로 표류하던 한국 공무원을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운 이 사건에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국제사회는 이 사건의 진상 조사를 촉구하며, 표류된 한국 민간인을 살해한 후 시신을 불태운 북한군의 행위는 명백한 국제 인권법 위반이라며 국제형사재판소 등을 통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채택

202012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전원회의에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북한 내부에서 확산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경계수위를 높이려는 차원에서 채택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반사회주의사상문화의 유입, 유포 행위를 철저히 막고 우리의 사상,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를 굳건히 수호함으로써 사상진지, 혁명진지, 계급진지를 더욱 강화하는데서 모든 기관, 기업소, 단체와 공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준칙들을 규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북한의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제정에 대해 극악한 반인권적 행위이며 이는 인권탄압의 상징이라 규탄하였습니다.

 

 

 

대북전단금지법’, 한국 국회 통과

20201214일 한국 국회 본회의에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법안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며, 2021330일부터 법의 효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국회에서의 대북전단금지법 통과로 북한 주민의 표현의 자유 및 알 권리는 더욱 제한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과 상관없이 정보와 사상을 구하고. 받아들이고, 전파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북한 주민은 북한 당국의 사전 승인 없이 외부의 인쇄물이나 시청각 자료를 소지할 경우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을 만큼 제한된 정보 안에서 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대북전단금지법은 북한 인권 문제의 불필요한 정치화 조치이자, 한국 헌법은 물론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에 따른 표현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이라 비판하였습니다

2021

2의 고난의 행군 선언

김정은은 202148일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 6차 세포비서대회에서 고난의 행군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제적 고립, 자연재해, 코로나 상황 등으로 인해 심화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제 2의 고난의 행군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 6차 당세포비서대회에서 당세포의 과업 10가지를 언급하며 사상교육과 통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탈북민 50여 명 강제북송

20217월 중국 당국은 탈북민 50여 명을 강제북송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북한 당국은 2020년 초 코로나 19의 방역을 위해 국경을 봉쇄한 후 714일 잠시 국경을 개방하였는데, 이 때 50여명 의 선양 수용소에 1~2년 가량 수감돼 있던 탈북민들이 강제 북송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단둥의 조선족으로 알려진 목격자는 14일 이른 아침 단둥세관이 개방되었고 수십명의 중국 공안들은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버스 2대를 통하여 탈북민들을 북한으로 보내버렸다고 언론을 통해 전하였고, 강제 북송된 탈북민 가운데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탈북했다고 체포된 이들은 북한에 돌아가면 극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은 1952년 유엔 난민협약, 그리고 1967년 난민의정서와 고문방지협약의 당사국으로서 고문과 학대의 위협에 처한 탈북민들을 보호할 국제적 의무가 있으나, 탈북민들을 불법 이민자로 규정하고 1986년 체결한 북중변경조약에 따라 강제송환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에 토마스 오헤아 퀸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안된다는 비엔나협약 제27조를 강조하며, 중국에 유엔 난민협약과 의정서, 고문방지협약 원칙을 이행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하였습니다.

 

2022

세계식량기구, 북한 외부식량지원 필요국재지정

유엔 산하 세계식량기구(FAO)34작황 전망과 식량상황보고서에서 북한을 전반적으로 식량에 대한 접근이 부족한 국가로 분류하고 외부의 지원이 필요한 44개국에 포함시켰습니다. 북한은 FAO가 해당 조사를 시작한 2007년부터 16년째 외부식량지원 필요국으로 지정돼 왔는데, 보고서는 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농업자재를 비롯해 인도주의적 지원품 등의 유입이 크게 감소하여 주민들의 식량에 대한 취약성이 증가됐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최근 북한에서는 식량이 없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절량세대(絶糧世帯)'’가 급증한 것으로 확인되며, 최근 함경북도 회령시, 평안북도 신의주시 등에서 아사자가 연이어 발생했다는 보도도 전해지는 등 북한 주민의 건강권과 생명권이 심각하게 위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코로나 19비상방역지침

북한 당국은 202112월에 진행된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을 ‘1순위 국가사업으로 꼽으며, 노동신문을 통해 매달(3월까지 계속) 코로나 19에 대한 방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침 하에 각 지방에는 비상방역지침서가 하달되었는데, 코로나 관련 업무에 대한 도() 보위국을 비롯한 시(), () 보위부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 확인됩니다. 실제 당국은 체온 재기 사업에서 유열자(발열자 37)가 발생할 경우, 관련 내용을 보위국에 보고하는 체계를 세운 것으로 확인됩니다. 주민의 사상과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보위부가 코로나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는 점에서, 당국이 방역을 명목으로 주민관리, 통제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